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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먼저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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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여야의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연일 "국가정체성이 뭐냐"고 노무현 대통령을 몰아세우고,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를 들먹이며 무차별 공세를 퍼붓는다. 양측 모두 사생결단의 기세다. 그런데 이게 전초전인 셈이니 걱정이 더 크다. 본격적으로 맞붙을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수도 이전, 친일 청산, 국가보안법 개폐, 언론개혁 공방 등 한결같이 여야간 견해가 팽팽하게 엇갈리는 난제들이다. 이대로 가다간 17대 국회 내내 싸움으로 얼룩질지도 모른다. 곤두박질치는 경제는 언제 챙기려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번 싸움은 이미 본질을 벗어나 말꼬리 잡기와 감정 대립의 흙탕물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은 이제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짜증만 날뿐이다. 정말 왜 싸우는 걸까? 감정과 정략의 더께들을 씻어내고 보면 박 대표가 던진 질문은 야당 대표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영해를 수호하기 위해 본분을 다한 군을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칭찬하기보다 질책하고 있다." "간첩혐의로 복역한 사람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중 어떤 사람은 민주화 인사가 됐다." "대통령과 언론.군.검찰이 갈등하는 것으로 보여 나라가 불안하다."

모두 이유있는 문제 제기다. 특히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사태를 둘러싼 잡음과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활동 및 결정을 두고는 비판이 거셌다. 수구 냉전적 사고라는 반론도 있지만 국가정체성에 대한 위기감 표출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야당 대표가 그러한 사회적 정서를 대변하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노 대통령이 제1야당 대표의 질문에 성의껏 답변하는 게 바른 자세다. 여권이 질문은 묵살한 채 "독재의 후예가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역공하는 작금의 모습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논점 일탈의 오류'에 해당한다. 건전한 토론문화와는 거리가 멀며, 박 대표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나 다름없다.

물론 박 대표의 질문공세엔 순수한 정책비판으로 보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부친이 거명되는 데 대한 개인적 감정이 묻어나고, 차기 대권을 향한 정치적 계산도 엿보인다. '전면전'이란 용어도 너무 자극적이다. 유신독재에 대한 뿌리깊은 한(恨)과 불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 여권이 박 대표 개인을 향해 펼치고 있는 총공세는 지나치다. 장학재단 문제까지 들고 나오는 기세를 보면 이참에 박 대표를 고사시켜 버릴 작정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여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박 대표는 야당의 대표로서 국정운영의 한 축이다. 국사를 함께 논의해 나가야 할 파트너다. 그를 만신창이로 만든다면 모두가 다짐한 상생의 정치는 물건너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소모적 정쟁은 하루빨리 끝내야 하며 그 해법은 여권이 원래의 논점으로 회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박 대표가 던진 질문에 반박이든 해명이든 답변부터 해야 한다. 워낙 휘발성이 높은 주제라 논쟁이 더욱 달아오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금 같은 흙탕물 싸움은 벗어날 수 있다. 토론정치의 품격을 끌어올리는 일은 그 다음, 여야 공동으로 만들어가야 할 과제다.

노 대통령과 박 대표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문제는 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여야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기 중인 난제들을 슬기롭게 소화해 내기 위해서도 여야 영수회담은 필요하다.

노 대통령님!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아량을 베푸십시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