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득권층 개혁으로 국난의 악순화 끊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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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인류사 백만년의 시야에서 볼 때 5천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 인류문명사에서 이같은 반복현상은 계속돼 왔으며, 지금도 우리의 역사엔 고대와 현대가 함께 있다.

큰 충격으로 닥친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임진왜란.조선왕조의 식민지화 과정과 많은 공통점을 내포한다.

가문세도 (家門勢道). 지역세도 (地域勢道) 등 갖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현상들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계속 답습돼 왔다.

원래 우리 민족은 기마인의 진취적인 현실감과 유교를 중시하는 농경민의 보수성을 함께 지녔다.

이 두가지 특성이 민족의 심성에 고루 반영된 고대엔 우리의 기세가 활짝 꽃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랜 사대와 쇄국의 역사체험을 거치며 그런 특성의 일부분만을 부정적으로 극대화함으로써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사대와 쇄국은 민중의 관심을 좁은 국내로 한정시키고, 퇴영적인 기풍을 조성했으며 국민 사이에 '네가 잘되는 것은 내가 잘못 되는 것이고, 내가 잘되려면 네가 잘못 돼야 한다' 는 빗나간 제로섬 게임을 자행케 했다.

우리의 역대 정권이 '정권 유지' 에만 혈안이 된 것도 바로 이런 쇄국의 연장선이다.

조선왕조하에서 기생한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해방 이후 지역세도로 탈바꿈했으며, 이는 정치권이 지역차별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는 행태로 이어졌다.

여기서 각종 차별이 난무하는 현실이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난 일들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그릇된 반복의 사슬을 끊고 우리가 처하게 된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한때 조상들이 지녔던 진취적 기질을 부활시켜 제2의 건국을 시작하려는 취지다.

얼마전 외국 신문에 남북한이 둘 다 깡통을 들고 남한은 돈을, 북한은 식량을 구걸하는 모습이 만화로 실렸다.

정말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는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은 지배층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강의 기적은 외채와 부패의 덩어리임이 이미 전세계에 알려졌고, 기득권층은 이 부패를 먹고 성장해 왔다.

한반도 상황을 놓고 4자회담이나 6자회담을 거론하는 외교적 상황도 조선말기의 열강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에겐 몇 번의 성공한 쿠데타가 있었을 뿐 단 한번도 성공한 계몽운동이 없었다.

일제식민지의 나락에 빠지고 6.25를 겪으면서도 정권은 국민적 차원에서의 진정한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러셀은 '소를 움직이는 세가지 방법' 에 대해 익살스런 얘기를 했다.

뒤에서 서서히 몰아가는 것, 그것이 안되면 앞에서 끌고 가는 것, 그래도 안되면 기중기를 이용해서라도 들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 개혁을 추진하는 우리의 처지는 아마도 마지막 경우가 될 터인데, 문제는 소 이상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지배층의 개혁을 통해 차별과 분열을 딛고 민족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야 한다.

아무리 국제화가 진행돼도 민족.국민국가가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민족의 특성을 건전하게 승화하고 일체감을 형성해야 미래가 있다 할 것이다.

또한 그릇된 중앙지향성을 탈피하고 지역발전을 꾀해야 한다.

특색있는 지방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다원사회의 첫걸음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국민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IMF 사태는 경제적 불행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비틀린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면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모든 민족구성원이 잠재력을 발휘하며 국민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제2의 건국을 이뤄야 한다.

김용운(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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