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판사와 정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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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변호사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과연 우리에게 어떤 판사가 좋은 판사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내 주장을 잘 들어주고 선입견 없이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면 좋은 판사인가. 아니면 절차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내게 승소 판결을 선고해 주면 좋은 판사인가 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공정한 절차가 중요하고, 결과는 증거와 법률에 따른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승패의 결과가 주는 충격 효과가 대단한 것이기에 선택이 쉽지 않다.

내 말을 막고 입증의 기회도 잘 주지 않으면 상대방과 교감이 있는 편파적 진행이라 의심하여 붉으락푸르락하다가도 막상 승소 판결을 받게 되면 그동안의 과정은 다 잊혀지고, 그는 훌륭하고 고마운 판사가 된다. 반면 공정한 진행과 변론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패소 판결이면 그 판사는 가차없이 엉터리 판사로 전락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재판이 그만큼 결과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듣기 좋은 구호를 내세우고, 내 편을 들어주면 좋은 정치인가. 아니면 결과적으로 나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좋은 정치인가 하는 것이다. 어느 국회의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실 야당하기는 쉬워요. 비판만 하면 되니까요. 우리도 야당할 때는 그랬고요. 하지만 국가를 운영해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건 참 어렵지요”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오래전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절엔 정부나 정책에 대한 비판은 비장하고 결연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판 그 자체가 덕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뀐 지금, 그 의원의 말대로 비판은 오히려 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인 사업이든, 공적인 행정이나 정치든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용하면서 이익이나 성과를 낸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가진 사람, 성공한 사람, 혹은 유명인을 비판하고 폄하하기는 쉽다. 또 그런 발언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정적인 보상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내가 성과를 내야 하는 입장이 되면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 폭탄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환호할 때는 마치 그렇게 환수된 돈이 내게 돌아와 나의 삶을 금방이라도 나아지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결과는 어떤가. 더욱더 벌어진 빈부격차와 청년들이 월급 모아 집 장만한다는 건 불가능한 꿈이 됐다는 비관 아닌가.

변호사들끼리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말도 있다. “똑똑한 판사가 오판한다”는 말이다. 오판은 실력이나 판단력 부족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상식을 깨는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판사는 한쪽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기울어졌다가도 상대방의 주장이나 증거를 보면서 생각을 바꾸기도 하면서 점차 중심을 찾아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간다는 것이다.

반면 똑똑한 판사는 세상 이치를 다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나머지 누가 뭐라고 주장하고 반박 증거를 제시해도 자신이 처음에 이해한 사건의 방향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실과는 다른 판단을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장력은 뛰어나 어떻게든 자신의 결론에 들어맞는 논리적 판결문으로 꽁꽁 묶어 상급심으로서도 감히 그 결론을 깨기가 쉽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똑똑한 판사가 어떤 면에서는 나쁜 판사가 될 수 있다. 이는 물론 소통 부재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야기일 것이다.

국정을 맡은 의원들이 의회라는 제도와 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박차고 나가 선동적 구호와 장외투쟁 및 반대투쟁으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소신을 내세운 서로의 기싸움 내지 싸움의 부추김만 있지 토의와 협조를 통한 선의적 결론 도출이라는 본래의 책무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방패 삼아 뛰어난 언변과 수사로 무장한 채 아예 대화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편 사람들의 속은 시원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그 탓에 우리네 삶은 아무런 진전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똑똑한 정치인들이 결과적으로 나쁜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실례를 보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김영혜 변호사

◆약력: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세계여성법관회의 부회장. 법무법인 오늘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