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보험금 자살'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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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보험금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 가족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요. 보험금으로 전세를 얻고 당장 급한 생활비는 쓰고 있지만 아빠없는 아이들을 키울 생각을 하면…. " 남편이 자살한 뒤 몸져 누워있던 주부 李영란 (가명.36.부산시금정구남산동) 씨는 요즘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파출부 일을 나간다.

하지만 李씨는 여전히 주1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남편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살아갈 날에 대한 불안감이 불면의 밤을 강요하기 때문. 건축자재업을 하다 IMF한파로 빚독촉에 시달리던 남편 朴모 (38) 씨가 자살한 것은 지난 2월.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朴씨는 3년 전 가입한 생명보험에 눈을 돌렸다.

30평 아파트는 빚쟁이에게 넘어가더라도 8천만원 보험금만은 가족에게 남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李씨는 " '내가 죽으면 보험금을 타 아이 키우는데 써라' 던 남편의 말을 흘려듣고 말리지 못한 게 한이 된다" 며 가슴을 친다. IMF이후 실직과 회사 부도로 벼랑에 몰린 가장들이 처자식에게 보험금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보험자살이 크게 늘고 있다.

보험가입 후 2년이 지나면 자살의 경우에도 보험금이 지급된다 (현행 생명보험 약관 42조1항) .그러나 생명을 담보로 한 이들의 결행은 오히려 평생을 고통속에 지내야 하는 결손가정만을 양산하고 있다.

수입목재상을 하던 金광철 (가명.32.인천시서구가좌동) 씨 역시 IMF이후 환차손을 견디다 못해 지난 3월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긴 채 자살했다.

부인 임모씨는 두살.세살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 부근으로 이사했고, 이제는 보험금도 바닥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양어장을 하던 진경화 (가명.36.충남보령) 씨도 자신의 죽음으로 보험금을 남긴 사례. 그는 사료값이 오른데다 매출부진이 겹쳐 1억원대의 빚을 지자 자살을 선택, 부인에게 4천여만원의 보험금을 쥐게 했다.

보험금으로 빚 5천만원을 정리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던 주부 金기순 (43.서울서대문구홍제동) 씨. 그녀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 "아들아 미안하구나…. 최후의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용서해 달라" 고 적었다.

취재팀이 국내 3대 대형 생명보험사의 올 상반기 보험가입자 재해사망중 자살건수를 분석해본 결과 예년에 비해 평균 20%이상 증가한 월 2백15건의 자살례가 집계됐다.

삼성생명의 경우 올 상반기 보험가입자 자살수는 6백30건으로 지난해 같은기간 5백30건에서 19% 늘었고, 보험금도 42억원으로 40% 증가했다.

재해사망보험금을 노린 위장자살 여부로 가입자와 보험사간의 분쟁도 늘고 있다.

지난 1월 충주호 주변도로에서 추락사한 정동수 (36.충남충주시상모면) 씨. 사료대리점을 하던 그는 IMF이후 매출부진으로 1억원대 빚을 졌다.

그는 곧 3억원에 이르는 보험에 가입했고 한달뒤 사망했다.

정씨 부인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 며 보험금을 신청했고, 보험사는 "사업실패에다 자주 다니던 도로인 점에 미뤄 자살" 로 추정해 분쟁중에 있다.

삼성생명 사고조사과 朴동철 대리는 "이런 사고유형이 지난해보다 3배이상 늘었다" 며 "거액의 보험 가입 후 단기간내 사망했을 때는 정황증거를 통해 자살여부를 판정한다" 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보험자살에 대한 충동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 '실직한 아버지의 모임' 金정대 회장은 "지난 3월 실직가장 1백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29%가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답한데다 최근 상담자 70~80%가 자살계획을 털어놔 이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고 토로한다.

한양대 보험학과 정요섭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파산하면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자영업들에 대한 사회보장이 절실하다" 고 말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고종관.정재왈.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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