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7.'무쇠다리'만든 계단훈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내가 US여자오픈과 제이미 파 크로거대회에 이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JAL빅애플클래식 대회까지 3주간 연이어 출전하는 걸 보고 이곳 사람들은 "박세리, 인간 맞아?" 하고 농담을 걸어온다.

연장전을 벌인 US여자오픈을 제외하고 각 대회는 4일간 4라운드로 치러지지만 보통 이틀간의 연습 라운드가 있고 프로암대회까지 포함하면 한달내내 필드에서 사는 꼴이다. 물론 나도 평범한 인간이다.

피노키오도 아니고 소머즈도 아니다.

TV카메라가 내 튼튼한 다리를 잡을 때 가끔 신경이 쓰여 다리를 감추고 싶을 때도 있는 평범한 처녀다. 내 다리가 이렇게 굵어진 것은 다 아버지 '덕분' 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엄청난 양의 체력훈련을 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훈련에 무엇이든 군말없이 따랐고, 아버지는 골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훈련은 무엇이든 시켰다.

내가 겪은 고된 훈련중에 아파트 계단 오르내리기는 아주 유익한 훈련이었다. 골프를 시작한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가 사는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목적은 물론 하체단련이다.

싱글 골퍼인 아버지는 골프에서 하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15층 계단을 다섯번 왕복하는 훈련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계단을 뛰어오를 때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지만 내려올 때는 뒷걸음질로 내려와야 했는데 이런 고통은 다시 없을 것이다.

뒤로 내려올 때는 아무리 급해도 한계단 한계단 내려와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나는 고통으로 가끔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세상에는 단번에,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게 없다" 고 꾸짖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뭐가 그리 힘들어, 임마" 하면서 나를 따라 뒷걸음질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영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두층 정도는 자신있게 내려오시다 다섯 층째부터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더니 "못하겠다" 며 항복해버리셨다.

계단 오르내리기에서는 단순한 하체단련보다 더 값진 것을 배웠다.

그것은 아무리 급해도 한계단 한계단 내려와야 하는 인내심이었다.

지금도 마음이 조급해지면 15층 아파트 계단의 출발점에 서있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물론 계단 오르내리기로 우람한 '거목' 이 된 내 다리는 연이은 대회 출전에도 끄덕없는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어머니는 내 다리를 훔쳐보며 "누가 데려갈까. 저 다리를…" 하며 농담을 하시곤 한다.

*** 이 수기는 박세리선수의 구술을 받아 김동균 뉴욕특파원과 체육부 김종길기자가 정리하고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