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시험에 든 추미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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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여성 정치인에겐 몇 가지 특장이 있다. 우선 돈 문제에 비교적 깨끗하다. 돈이 오가는 술좌석과 거리가 멀고, 거느리는 계파가 없거나 있어도 돈으로 조종하지 않으며, 금전·권력에 대한 욕구가 남성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경쟁력은 갈등 조정 능력이다. 천성적으로 여성의 이미지는 부드러움이나 모성애와 분리될 수 없다. 분노와 욕구로 충혈된 군중이 맹수처럼 달려들 때 여성 정치인은 솜씨 좋은 조련사가 될 수 있다.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에선 박근혜 대표가, 민주당에선 추미애 선대위원장이 앞에 나서 ‘노무현 탄핵’의 용서를 빌었다. 근육질 남성이었다면 화난 유권자는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 정치인은 그러나 아직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한다. 선진국처럼 한국에서도 여성이 결정적인 조타수를 맡을 능력이 있는지 유권자는 지켜보고 있다. 파워만큼 정치력도 성숙하고 있는지, 조물주가 부여한 갈등 조정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지, 외모나 말솜씨가 아니라 콘텐트로 승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유권자는 궁금하다.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은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누리고 있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치고 판사가 됐다. 똑똑한 여판사로 꼽혀 야당지도자 김대중에게 발탁됐다. 그는 열린우리당을 따라가지 않았으며 낙선을 감수했다. 그런 소신 덕분에 지난해 총선에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울에서 당선됐다. 3선이 되자 제1 야당 대표를 놓고 정세균과 맞붙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 추미애는 지금 중요한 시험에 들어 있다. 정부가 제출한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그는 상임위에 상정하지 않았다. 고용시한 연장은 비정규직 문제를 키울뿐더러 양대 노총을 포함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유가 어떻든 법안은 상정되지 않았고 비정규직이 줄줄이 해고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추미애 실업’이라 공격한다. 추미애는 정치인생 최대의 논란에 휩싸였다. 그에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그의 문제는 ‘소신의 방법론’이다. 그는 노동자를 위한다는 진정성에만 몰입했지 효율적인 방법에 대해선 고민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상임위원장은 타협의 중재자지 문제의 결정권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법안 상정, 심사소위 구성, 이익단체의 토론 참여, 법안 마련이라는 정상적인 절차를 봉쇄했다. 그는 “노동부 법안은 문제가 많았는데 그대로 상정하고 심사소위를 구성했더라면 정부안 그대로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부안이든, 한나라당 안이든, 민주당 안이든 법안심사라는 용광로에 넣어 쇳물을 뽑아내는 게 국회가 할 일이다. 무슨 이유든 국회가 무용지물이 된 건 상임위원장의 책임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정성만 믿고 비정상적인 방법론에 의존하다 사회의 갈등을 키워놓았다. 추 위원장은 노무현 사례를 통해 소신의 방법론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신이 아무리 강해도 신문에 ‘OO’이나 ‘XX’로 표현되는 언사를 쓰는 건 여성 정치인의 특장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다. 추미애는 2004년 탄핵역풍으로부터 민주당을 구하러 3보1배를 감행하는 의지력을 보였다. 이런 의지력에 정상적인 방법론만 합치면 그는 강력한 동력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