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 둔 직원 내쫓아 … 정치권이 날 죄인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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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근로사업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 및 취업설명회’가 3일 서울 성산동 마포구청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취업 관련 자료를 보고 있다. [뉴시스]

#1. 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청소 용역업체 사장실. 박모(62) 사장은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인원 현황판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이름이 조직도 한쪽 귀퉁이에 따로 적혀 있었다. 박 사장은 “요즘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밥맛도 없다”며 “출근해도 직원들 마주칠까 봐 방에만 앉아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28명의 직원 중 13명이 비정규직이다. 월급이나 대우가 정규직, 비정규직 차별 없이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세 명에 이어 다음 달에 한 명, 9월에 또 한 명, 10월에 다섯 명 등 내년 3월까지 총 13명을 내보내야 한다. 중소 규모 빌딩의 청소 용역을 따내 일하다 보니 업무량이 매달 달라 모든 직원을 정규직화할 수 없고, 그럴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박 사장은 “취업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내쫓자니 면목이 없다”며 “정치권에서 진짜 시행하는 건지 유예할 건지 빨리 결론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 충북 청주의 한 도어 전문업체는 비정규직 여섯 명을 지난달 말 계약 해지했다. 이모(55) 사장은 “좁은 공장에서 같이 생활하다 보니 우린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갠지도 다 안다”며 “지금 같은 경제위기에 어디 가서 뭘 해서 먹고살지 밤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그는 또 “특히 한 분은 딸이 고3인데 아버지가 직장을 잃어 공부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업체는 아파트 현관문이나 단독주택 주물 대문을 전문으로 생산한다. 주문 물량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직원을 정규직화할 수 없다고 한다. 또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경우 보험료나 퇴직금 등을 감안하면 두 배의 인건비가 든다고 설명했다.

이 사장은 “연말까지 10여 명을 더 내보내야 한다”며 “작업장 한쪽 구석이 벌써 텅 비어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 시행이 유예되면 어떻게 하든 재계약해 같이 살아볼 요량이었다”며 “직원들도 다 그렇게 믿었는데 정치권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탄했다.

비정규직 고용기간 제한(2년) 규정이 시행되면서 해고 근로자뿐만 아니라 사업주들의 고민과 혼란도 깊어지고 있다.

본지는 비정규직을 내보낸 중소기업 사장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아픔도 크지만 숙련된 기술자를 구할 수 없어 경영에도 타격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위기로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그 이후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부 이주일 고용차별개선정책과장은 “대부분의 대기업은 인력 아웃소싱이나 도급위탁계약 등의 장치를 마련해 고용 제한기간 규정 시행에 따른 충격이 덜하다”며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설마설마하다 법이 시행되자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정인호 인력정책팀장은 “지금도 정치권 눈치만 보며 계약이 만료된 비정규직이 계속 근무하는 사업장도 많다”며 “정치권이 법 시행 여부를 빨리 결정짓지 않으면 여기저기에서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마찰이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정훈 기자

말말말

“해고될 직원들과 마주칠지 몰라 사장실에 갇혀 지낸다.” -서울 마포의 청소 용역업체 사장

“ 간병일이 힘들고 경험이 필요한데 어디서 사람을 구하나.” -서울 구로의 노인요양병원 원장

“맘 같아서는 정규직 전환하고 싶지만 회사가 망하면 누가 책임지나.”

-경남 양산의 소재업체 사장

“나가면서 원망이라도 했으면 맘이 편할 텐데, 아무 말 없이 가니 가슴이 더 찢어진다.”

-서울 여의도 증권사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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