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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얻어 오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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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체부 아저씨가 오셨습니다. 우리 집 앞을 지나는 오토바이는 둘. 뒷집 아저씨 아니면 우체부 아저씨의 것인데 재빠르게 세우는 소리로 우체부 아저씨인 줄 압니다. 오늘은 더군다나 '빵'소리까지 울려주시니 반갑게 우편물을 받으러 나갑니다.

돈 내라는 고지서가 두 통, 잡지가 한 권, 알고 지내는 출판사에서 보낸 등기가 한 통입니다. 고지서를 보니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지난달 손전화 요금을 안 냈으니 이번 달에 함께 내라 합니다. 잡지 표지를 보니 마음도 무거워집니다. 중증 장애인들이 장애인 고용 장려금을 줄이지 말아달라고 시위하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전화가 울립니다.

"좋은 소식이었음 좋겠네."

전화마저 반갑지 않은 소식일까 싶어 혼자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듭니다.

"응. 바쁜가? 감자 가져가야지."

앞마을 사는 김 집사님입니다. 올해는 우리 밭에 감자를 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나눠주실 모양입니다. 그런데 반갑고 고마운 마음 한 구석에 송구한 마음이 함께 끼어듭니다.

예전에는 뭔가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공짜로 생기는 것이니 그냥 좋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내 손으로 곡식을 키워보니, 알겠습니다. 콩 한 알, 채소 한 뿌리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씨앗만 뿌려두면 해와 바람과 비가 농사를 다 지어주는 줄 알았는데, 식물에 대한 이해와 섬세한 손길과 부지런한 몸놀림과 지치지 않는 체력 없이는 어림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날씨마저 예전 같지 않으니, 때 놓치지 않고 일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집사님네 감자도 씨감자를 마련할 때부터 시작해 숱한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밭에 로터리를 치고 밤잠을 설치며 씨감자를 잘라 두었건만 뒤늦게 봄눈이 내렸습니다. 씨감자가 더러 얼었으니 다시 준비해야 했고 눈이 녹고 밭의 물이 빠질 때까지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씨감자가 다시 얼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두둑 위에 비닐을 씌우고, 싹이 밖으로 나오도록 비닐에 구멍을 내주고, 충실한 알이 들도록 곁순을 따주고, 잡풀을 매주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감자를 캘 즈음에는 매일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캐내지도 못하고 밭에서 다 썩힐까 마음 졸이기를 하루 이틀. 잠깐 갠 날씨에 감사하며, 밭이 질척거려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감자를 캐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키운 귀한 감자를 나눠 주시니 '감사하다' '잘 먹겠다'는 말이 작게 여겨집니다. 더 큰 말이 없을까 생각하다 말주변 없는 내가 겨우 꺼낸 말.

"지난해보다 더 잘 되었네요."

집사님네 창고 앞에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유기농 감자알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닙니다. 집사님은 어줍은 인사치레에는 마음 쓰지 않고 쌀자루를 가져와 주섬주섬 감자를 담아주십니다.

"날 궂어서 벌써 썩을라구 그려. 잠깐 말리느라구 꺼냈지. 퍼어래질까 걱정인디 그래도 썩는 거보담 나을 껴."

겨울까지 먹을 감자라 보송보송 말리려는데, 막상 감자알을 꺼내놓고 보니 젖먹이 업고 다니는 내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랍니다.

한 자루 가득 감자를 싣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빠듯한 내 집 살림이 어깨를 처지게 하고 장애아를 키우며 바라보는 세상이 조금은 갑갑해도, 마음을 다시 다잡아 봅니다. 정작 당신들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우리 식구를 먼저 걱정해주는 이웃들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외롭지 않으니 견딜 만합니다.

들녘은 초록 물결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오르는 벼 잎들을 바람이 쓰다듬으며 지나갑니다. 잘 자라거라 격려해주는지도 모릅니다. 큰바람에도 잔바람에도 벼들은 끄떡없이 자랍니다. 저도 그렇게 끄떡없이 살아야겠습니다.

추둘란 여성 농민

◇약력 : 건국대 농학과 졸업, 국문학 석사. 현재 충남 홍성에서 유기농법으로 농사 지음. 다운증후군 아들 민서와 이웃의 이야기를 엮은 수필집 '콩깍지 사랑'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