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답사기]27.덕흥리 벽화무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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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아직 일반인까지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전문인들 사이에서 덕흥리벽화무덤이 갖고 있는 명성과 권위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고대사.미술사.민속학.복식사.음악사 등에 관한 저서에서 이 무덤벽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엉터리거나 1980년 이전에 나온 헌책임에 틀림없다.

북한이 덕흥리벽화무덤을 발굴한 것은 1976년 8월이었고 이것이 남한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77년 12월 일본의 한 화보책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해진 덕흥리벽화무덤이 이내 한국 고대문화사의 대표적인 유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6백여자나 되는 문자기록과 14행 1백54자의 묘지 (墓誌) 때문이었다.

사실 고구려 벽화무덤이 80여기 발굴됐다지만 문자기록을 갖고 있는 것은 안악3호무덤.모두루무덤 두 개에 지나지 않았고 그 무덤이 몇년도에 만든 누구의 무덤인가를 정확히 밝혀놓은 것은 덕흥리벽화무덤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결국 덕흥리벽화무덤은 모든 고구려 벽화무덤의 기준작이 되는 기념비적 유물인 것이다.

덕흥리벽화무덤의 관리원인 김도수 (金道洙.63) 씨는 환갑을 넘긴 평범한 문화재 지킴이였다.

지위가 높은 것도, 학식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어울리지 않게 큰 모자와 마디 굵은 거친 손은 무덤잔디를 가꾸는 막일에 능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덕흥리벽화무덤에 대한 자랑 및 사랑과 지식만은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

관리원아바이는 무덤 내부로 안내하기에 앞서 우선 묘지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로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나는 실물을 못 보았을 따름이지 해마다 가르치는 한국미술사 시간에 이 무덤벽화를 앞칸.안칸.천장 할 것 없이 두루 슬라이드로 비춰 설명하고 이 묘지로 말할 것 같으면 시험문제에 어김없이 출제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 관리원아바이가 모처럼, 아니 평생 처음 남쪽에서 온 동포를 만나 맘껏 자랑할 기회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관리원아바이는 내가 말했으면 1분에 마칠 것을 10분을 걸려 감동적인 신파조로 풀어갔다.

"이 묘지에 무어라 했냐 하면, 첫째 줄에는 운천.박천지방에서 태어났다.

둘째 줄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고 이름은 진 (鎭) 이다.

셋째.넷째.다섯째 줄에는 이 분이 지낸 벼슬을 쭉 다 밝혔는데 국소대형 (國小大兄)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거쳐 유주자사 (幽州刺史)에 이르렀다.

여섯째 줄에는 77세에 죽었는데 이때는 영락 (永樂) 18년, 즉 408년이다…. 열두째 줄에는 묘를 만드는 데 만명의 공력이 들었다.

열셋째 줄에는 소고기.양고기에 술과 밥을 지었는데 쌀과 소금이 한 창고 분량이었다. 끝으로 열넷째 줄에는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니 영원하리라고 했단 말입니다. "

숨도 쉬지 않고 마침표 없이 이어가는 관리원아바이는 어찌나 힘을 꾹꾹 주며 말하는지 머리에 땀방울조차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문을 열어젖히고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난 드디어 꿈에나 그리던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내부는 좁은 안길 (羨道) 을 제외하고 앞칸과 안칸은 모두 유리로 막았는데 벽화와 유리의 간격을 넓게 확보한 만큼 관람객이 움직일 공간은 좁았다.

벽화의 상태는 대단히 양호했다. 벽과 천장에 빈틈없이 그려진 그림들은 서툰 듯 고졸한 기법이긴 했지만 기운이 생동하고 박진감 넘치는 것은 역시 광개토왕 시절 고구려인들의 기상이고 솜씨임을 유감없이 말해주고 있다.

덕흥리벽화무덤은 앞칸과 안칸으로 구성된 양실 (兩室) 무덤이다.

안악3호무덤과 마찬가지로 앞칸엔 공적인 삶, 안칸엔 사적인 삶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래서 앞칸엔 유주자사가 13군의 태수 (太守) 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는 엄숙한 정사 (政事) 장면을 비롯해 장엄한 행렬도가 그려 있고 안칸에는 편안한 자세의 또 다른 초상과 함께 나들이 가는 장면, 활쏘기대회 같은 생활도가 그려 있다.

그중에서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은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러나 덕흥리벽화무덤에는 안악3호무덤과는 달리 궁륭식 평행고임의 높은 천장벽에 환상적인 벽화를 그려 넣었다.

안칸의 천장에는 연꽃.불꽃.구름무늬를 장식무늬로 그렸지만 앞칸 천장에는 천상의 별자리와 해와 달, 그리고 온갖 희귀한 날짐승, 상상의 동물들이 떠돌고 있다.

거기엔 봉황, 길조 (吉利鳥) , 부귀의 새, 나는 물고기 (飛魚) 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천상의 숲속엔 고구려의 사냥꾼들이 앞으로 뒤로 날뛰고 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감지되지 않던 현란한 움직임이 어려 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맴을 돌며 보고 또 보고 감탄을 그칠 줄 모르고 있자니 관리원아바이가 또 다른 해설을 들려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마도 관리자 교육과정에서 배웠음직한 유식한 학술용어를 곁들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무덤 안을 지상의 생활환경처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살아 있다는 믿음에서 천상의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놓음으로써 무덤 안을 축소된 우주로 형성했습니다. "

그 '축소된 우주' 에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감동의 장면은 견우와 직녀 그림이었다. 비록 필치에 서툰 면이 있지만 긴 은하수 건너 견우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직녀의 모습은 애처롭기만 하다.

나는 우습게도 이 그림을 보고야 견우는 끌 견 (牽) 자 소우 (牛) 자이므로 소를 끌고가는 총각으로 그린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챘다. 관리원아바이가 또 다시 해설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신파조다.

"처녀 총각이 1년에 한번 만나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데 만나자 곧 이별해야 하니 얼마나 슬프겠어요. 그러니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겠어요. 그래서 칠석이면 비가 온답니다." 그렇게 관리원아바이의 인도에 따라, 해설에 따라 '축소된 우주' '환상의 천국' 을 남김없이 둘러보고 거진 반시간만에 지상의 세계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나오니 밖은 유난히 밝았고 바람은 예쁘게 불었다. 실바람을 맞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려는데 관리원아바이가 나의 만족스런 표정을 보면서 흡족한 웃음을 보낸다. 그것은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천진한 미소였다.

순간 나는 신라할아버지 윤경렬선생과 서산마애불의 관리인 성원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문화유산을 지키는 이 작은 일에 일생을 바치며 큰 보람을 찾는 저 예사롭지 않은 인생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다시 한번 보냈다.

결국 신라는 윤경렬을, 백제는 성원을, 그리고 고구려는 저 김도수아바이를 지킴이로 삼고 있는 셈이었다. 위대한 문화유산은 이처럼 위대한 관리인을 만나서 살아남는가 보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다음 회는 1부 마지막 회로 '강서큰무덤'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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