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을 두텁게] 실업급여·생계비 신청자 줄어들고 있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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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형주(32)씨에게 중산층 진입은 험난하다. 전문대학에서 정보통신을 전공한 나씨는 2002년부터 3년간 대기업 전산실에서 야근조로 근무했다. 낮에 일하는 직장을 찾아 금융 업계로 이직한 후 4년간 보험설계사 등으로 일했지만 지난해 5월 부모님이 중병을 앓으면서 간호를 위해 잠시 일을 그만뒀다. 올 1월 재취업을 위해 100개 이상의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경제위기가 겹쳐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제안 받은 일자리는 연봉 2000만원 이하의 다단계 회사나 부동산 영업직뿐이다. 2주 전부터 노동부 남부고용지원센터에서 재취업 교육을 받고 있는 나씨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자신감도 잃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며 “취업 교육을 받고 적성에 맞는 일에 재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광기·이점님씨 부부가 서울 구로4동에 있는 햇님식당 앞에서 웃고 있다. 김씨 부부는 3000만원의 소상공인 정책 지원금을 받아 식당을 차렸다. [김형수 기자]

#2. 30대 가장 김모(36·서울 은평구)씨도 벼랑 끝에 서 있다. 4년제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홈페이지 디자이너로 일하던 김씨는 올 초 직장을 그만뒀다. 180만원의 월급으로 아내와 아홉 살, 네 살 두 아이를 먹여 살리면서 매달 적자였다. 조건이 나은 직장을 구하려 했지만 경기 침체로 5개월째 실직 상태다. 회사가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그동안 부모님께 손을 벌리거나 연 12~13% 고금리 신용대출을 받아 월 200만원의 생활비를 댔지만 얼마 전 이마저 동났다. 김씨는 최근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해 90만8700원을 받았다. 김씨는 “당장 급한 불을 껐지만 정말 필요한 건 생계를 감당할 만한 일자리”라고 말했다.

올 초만 해도 생계비를 지원하는 긴급지원제도와 실업급여 신청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크게 늘었으나 최근 주춤하고 있다. 서울남부고용지원센터 이선이(40)씨는 “올 1, 2월 하루에 250~300명이 실업급여 창구를 방문했으나 요즘에는 150~180명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경제위기 이후 추경 예산을 편성해 각종 고용 유지 정책과 빈곤 추락 방지 안전망이 쏟아졌고 그게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셈이다. 가장 큰 효과를 낸 제도는 일자리 나누기다. 경영위기에 처한 기업이 근로자를 해고하지 않고 직업훈련 등으로 끌어안고 있을 경우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은 기업이 1월 1327개에서 5월 5495개로 늘었다. 실업급여 최장 수급기간을 8개월에서 1년으로 늘린 것도 도움이 됐다. ▶휴·폐업 가정에 긴급 생계비를 지급하고 ▶25만4673명에게 희망 근로 일자리를 제공하며 ▶자영업자 정책자금 대출을 늘린 게 주효했다. 3월까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행정 창구 병목현상도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신빈곤층이 중산층으로 복귀하고 한계 상황에 처한 중산층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부의 지원은 제한적이고 중산층의 삶을 지탱할 만한 일자리는 공급이 끊겼다. 20, 30대는 진입 단계에서부터 좌절을 맛보고 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구인회 교수는 “정부의 복지정책 중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것은 거의 없다”며 “경제위기 이후 한시적으로 지원 대상자를 늘리긴 했지만 워낙 소폭이라 중산층 몰락 방지 효과는 작았다”고 평가했다.


까다로운 지원 조건이 장벽으로 작용한다. 서울 구로시장에서 ‘한우 일번가’라는 식당을 운영 중인 김혜경(43)씨는 최근 가게 수리를 위해 자영업자 특례보증 3000만원을 신청하려다 포기했다. 10년 전 보증을 섰다가 수억원대의 빚이 넘어와 파산 신청을 한 남편의 신용이 문제였다. 서울 구로동에서 미용실을 운영 중인 김경미(46)씨도 월세를 내기 위해 신용보증재단에 1000만원의 보증을 신청했다가 국민연금을 연체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지난달 25일 시행된 자산담보 생계비 대출도 26일현재 대출을 받은 사람이 140여 명에 불과하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70%를 다 채웠으면 대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도 생활형편이 개선되는 데 통상 1~2년 걸린다. 위기 가정 긴급 생계비 지원 등 대부분 지원책이 올해 말로 끝난다. 그때까지 일어서지 못하면 신빈곤층에 머물거나 빈곤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가족부 이태한 복지정책국장은 “추락한 중산층이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지원을 끊지 않는 방안을 경제부처와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기찬·안혜리·장정훈·김은하·강기헌·허진 기자 insight@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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