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이름의 국제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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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미스터 쑤, 미스터 쑤.”

3년 전 중남미 지역에 처음으로 출장 가서야 내 이름이 그렇게도 발음된다는 걸 알았다. 현지 공항ㆍ호텔에서 난 그렇게 불렸다. 내 성(姓)의 로마자 표기가 ‘Suh’여서 생긴 일이다. 20년 전 여권을 처음 만들 때, 영어권 발음만을 고려해 큰 고민 없이 그렇게 정했는데, 스페인어권이나 프랑스에 가니 나는 내가 아니었다.

중남미에 다녀온 뒤 명함을 받으면 꼭 영문 표기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의외로 많은 한국인의 명함에서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릎을 탁 치게 할 만큼 창의적인 표기도 많았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Lee, O-Young’으로 쓴다. 30대 초반의 ‘젊은이’ 시절에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어령’을 현행 로마자 표기 원칙에 따라 적었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외국인이 발음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웠을까.

뭔가 자신만의 의미를 담은 듯한 표기도 눈에 띈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Young-Key Hwang’이다.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떠오른다. 원철희 전 농협 회장은 ‘Won, Churll Hee’다. 특이하게 ‘철’자에 ‘l’을 두 개나 표기한 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 온 처칠(Churchill) 영국 총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다.

아예 영어 이름을 쓰는 이도 많다. 카이스트 안철수 교수는 ‘Charles Ahn’이다. 1995년 처음 미국 유학을 갔을 때만 해도 그는 ‘Cheolsoo’였다. 이름을 보고 당황해 하는 외국인을 접하고, 편하게 부를 수 있고 한글 발음과도 가까운 이름으로 바꿨다.

영어 이름을 아예 따로 쓰는 이도 많다. 한글 이름은 중간이름(미들네임)처럼 표시하기도 한다. 자동차 평론가인 황순하 GE코리아 전무는 ‘Steven(SoonHa) Hwang’으로 쓴다.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지낸 카이스트 홍인기(In-Kie HONG) 초빙교수는 성과 이름이 헷갈리지 않도록 성을 대문자로 표시한다.

‘Sin(죄)’ ‘Bum(건달)’처럼 좋지 않은 의미가 있거나 ‘Duck(오리)’처럼 우스꽝스러운 단어를 피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신한금융지주 최범수(choi, buhmsoo) 부사장이나 삼일회계법인 한덕철(Deuck-Churl Han) 전무의 경우다. 하지만 유명한 최고경영자 중 이름의 ‘석’자를 비어에 많이 쓰이는 ‘Suck’으로 표시한 분도 있었다.

지난주 국립국어원이 성씨 로마자 표기법 시안을 내놨다. 이를테면 박씨는 Bak으로, 이씨는 Yi로, 신씨는 ‘Sin’으로 표기하자는 내용인데, 논란이 많다. 이어령 고문은 “왜 가족이나 종친회가 할 일까지 국가가 나서서 하느냐”고 했다. 정책 실효성도 없다. 외교통상부는 이미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다녀온 사람에 대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영문이름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처음 영문 이름 표기를 정할 때부터 신중해야 한다. 요즘 아예 영문 표기를 고려해 한글 이름을 짓는 부모도 많다. 하씨 성의 내 친구는 아들 이름을 ‘이든’으로, 영문 표기는 ‘Ethan’으로 정했다. ‘쿨’한 이름이다. 가족의 첫 해외여행지를 고르는 정성의 일부라도 기울여 부르기 쉽고 글로벌 시대에 맞는 자녀의 이름과 표기를 고민했으면 한다. 부모가 자식에 남겨주는 게 어디 재산뿐이겠는가.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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