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은행퇴출이 남긴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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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5개 은행의 강제퇴출은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의 표현대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고통선택" 이라고 해도 많은 후속과제를 남겼다.

마지막 단계에서 경영평가위원회의 권고와는 달리 평화은행을 제외한 것이나 퇴출은행을 비경제적 고려에 따라 선정한 흔적이 있는 점은 당국이 더 확실하게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건부 승인을 받은 은행중 일부 대형 시중은행에 대해 감자 (減資)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도 석연치 않다.

그러나 더 큰 과제는 퇴출은행의 임직원과 주주에게만 책임을 지게 하고 당초 문제를 배태한 이른바 관치금융의 장본인인 권력과 관료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점이다.

이들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고 단기적인 개혁실적에만 급급하다 보니, 과연 일부 소형 우량은행에 의한 리딩뱅크 육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이와 관련해 李금감위원장이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잔존한 대형은행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업과 합작하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발언이 과연 국내 대기업이 은행경영의 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인지 추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최근 김우중 (金宇中) 차기전경련회장이 국내대기업과 국제자본이 참여하는 은행설립을 제창한 바 있는데 이것도 허용하겠다는 것인지 관심거리다.

다시 말해 정부에 의한 강제적 구조조정이 끝나면 과연 우리나라 은행들이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지 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에 정부는 답변해야 할 것이다.

퇴출은행을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을 충족한 은행과 짝짓는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지속적으로 연구해 봐야 한다.

부실해진 은행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실은행을 인수하는 은행이 인수후 경쟁력이 강화되려면 비교우위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번 결과를 보면 걱정되는 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서민금융을 주시장으로 해 왔던 은행이 갑자기 대기업 및 국제금융업무에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논리에 옹색한 구석이 있다.

따라서 금융감독당국은 차후에도 경영감독에 대해 긴장된 자세를 풀어서는 안될 것이다.

李위원장은 은행의 퇴출이 미치는 임직원 구조조정의 여파를 의식해 대리급 이하 행원들에게는 아무 불이익 없이 인수은행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과연 지킬 수 있는 약속인지 의문시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더욱 의문이다.

왜냐하면 조건부 승인을 받은 은행들도 승인의 조건으로 엄청난 인력감축을 요구한 것과 형평이 맞지 않을 뿐더러 인원감축을 수반하지 않는 구조조정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노동시장 사정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 이해되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편이 결국은 올바른 정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은행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최대과제는 부실채권 해소부분이다.

이번에는 은행 퇴출방식을 자산.부채인수 (P&A) 로 택했기 때문에 인수은행은 부실채권 부담을 덜게 됐지만 최종적인 부담은 공채발행을 통해 결국 국민이 지게 돼 있다.국가경제 운용에도 그만큼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보증 공채를 발행하려면 당장 국회를 열어 절차를 밟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은행 인수방식을 택할 경우 본원통화의 증가를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장치가 시급하다.

통화안정증권으로 흡수하면 그만큼 비용이 더 들고 재정이 분담한다 해도 결국 주름살은 불가피하다.

또한 현재 같이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부실기업은 계속 양산될 것이고 그만큼 은행의 부실채권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도 어느 선에서 막아야 하는데 정부는 언제까지 구조조정을 대충 마무리한다는 말만 하지 원천적으로 기업경영의 부실을 막을 수 있는 정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금리동향이나 디플레 진행을 감안할 때 통제가능한 수준에서의 설비투자와 소비진작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늘려 5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구조조정의 피해와 이득간의 균형을 고려해 고금리로 인한 일정수준 이상의 소득에 세금을 중과하도록 세제개편을 서두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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