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도전기 1국' 정석을 잊어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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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기 왕위전 도전기 1국
[제2보 (20~35)]
黑.李昌鎬 9단 白.李世乭 9단

장수영9단은 제주도가 제2의 고향이다. 전국 어느 곳보다 열성적인 제주도 바둑인들과의 인연이 깊어져 이젠 제주도 사람이 다 됐다. 시.도 대항전에서도 제주도 선수로 나올 정도다.

이번 대회에 심판으로 제주도에 동행한 장9단이 이창호9단의 27을 보며 아하! 하고 나지막이 탄식한다. 정석에서 벗어난 이 한 수가 광풍노도를 꿈꾸는 이세돌9단의 의도를 가볍게 무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석을 익히되 다 익힌 뒤엔 잊어버려라'고 옛 사람들은 말했다. 정석은 오랜 세월 정리된 정법의 압축된 수순이다. 그 귀중한 익힘을 왜 잊으라고 한 것일까. 정석은 비록 훌륭한 것이지만 여기에 얽매인다면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할 수 없다. 고정관념의 위태로움을 경계한 것이다.

백△의 씌움에 흑▲로 대응하는 이 정석은 변화가 100개도 넘는다고 해 대사백변(大斜百變)이라 불린다. 암수도 많고 노림도 많아 자칫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백이 26으로 막았을 때 가장 일반적인 정석 수순은 '참고도1'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백8의 공격이 신랄해 흑의 고전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이세돌9단이 원하는 그림이다.

27은 변칙이다. 그러나 축머리가 좋은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멋지게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참고도2'의 백1로 막아도 흑8에 이르러 백 두점이 축에 걸리게 된다.

"27이 좋은 수. 여기서 조금 당했다."(이세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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