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속 깊은 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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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1학기 성적표가 배달됐다. 성적표를 받고 보니, 처음 대학에 들어가 교양과목 리포트 때문에 쩔쩔매던 일이 떠올랐다. 마흔이 넘은 늦깎이다 보니, 20대의 학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됐다. 수업시간표도 혼자 짜야만 하고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나이 차이 때문에 현역들에게 묻지도 못하고 조교를 찾아다니며 수업시간표는 얼렁뚱땅 짰으나 과목마다 웬 과제물이 그렇게도 많은지….

'한국 역사와 문화'라는 교양과목의 과제물을 위해 두달 동안 신문을 스크랩해 가며 열심히 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옆자리의 학우가 내가 제출하려던 과제물을 들춰보더니, 과제물을 잘못 알아듣고 해온 것 같다고 귀띔해줬다.

과제물을 다시 해야겠는데 오래된 신문에서 자료를 찾아 복사를 해야 하는지라, 그런 신문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제출할 날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바쁜 토요일 날 가게문을 닫고 과제물을 하러 갈 수도, 안갈 수도 없어 마음만 급했다. 현역 학우들이 자료 양을 늘리기 위해 자기들끼리 서로 복사물을 주고받는 것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잘 못 해놓은 과제물을 붙들고 가게도 안 나가고 울고 있는 나를 본 남편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다. 토요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용실로 출근해서는 손님을 받느라고 눈코 뜰 새 없었다. 손님 머리를 만지면서도 온통 과제물에 마음이 가 있다 보니 오전 9시에 나가서 걱정 전화 한 통 없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오후 4시쯤에 남편이 가게로 들어왔다. 손님을 받다 말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남편의 지친 얼굴과 땀에 흠뻑 젖은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의아해 하는 내게 남편은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이거 자네 과제물이야. 울지 말고 마무리해"하는 것이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10년 전의 것부터 현재까지 관련 신문기사를 다 찾아서 복사한 것이었다.

"당신 밤새 끙끙 앓는 소리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그래서 직장에 월차를 내고 '도서관'에서 1년치 묶음신문을 들고 4층과 1층을 오르내리며 복사해가지고 왔다는 얘기였다.

연애할 때 공부 욕심에 결혼을 미루겠다는 내게 "결혼 후 언제라도 공부하겠다면 열심히 내조하겠다"고 약속했던 남편은 지금도 잊지 않고 내 공부를 잘 도와준다. 직장 때문에 힘들고 고달플 텐데 늦은 시간에 퇴근해서도 내가 신경 안 쓰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설거지며 청소 등 집안일을 거든다. 시험기간이면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나를 방해하면 안 된다며 커피를 타서 내밀고는 아들 방으로 베개를 들고 가는 남편. 늦게 시작해 집안일과 미용실 일에 쫓기면서 늦게라도 학업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남편의 속깊은 마음씀씀이 덕이라 믿는다.

오병금 (47.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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