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뉴욕읽기]한국의 국제적 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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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0년 전 이야기다. 어느날 이웃집 사람을 만났다.

그가 말했다.

"다음 주에 한국과 홍콩을 가는데 한국을 설명하는 영어로 쓰인 책자나 관광 안내서를 구하고 싶다" 고. 나는 "책방엔 가봤느냐" 고 물었다.

"가봤으나 없었다" 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곧 구해 주겠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책방엘 가보니 한국 안내 책자가 없었다.

중국과 일본은 수십권씩 있고, 홍콩과 싱가포르, 베트남과 라오스 등에 관한 책도 두어 종류씩 있는데 코리아가 없다니, 오기가 발동했다.

마침내 한 작은 책방에서 한국 안내책을 하나 만날 수 있있다.

세계여행 안내서적으로 유명한 포도어 (Fodor' s modern guides) 의 1982년판이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일본과 한국' 이었다.

제목 글자가 '일본' 에 비해 '한국' 은 6분의 1도 안될 만큼 작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책의 내용이었다.

전체 4백68쪽에서 한국은 33쪽뿐이었다.

14분의 1이라니! 한국은 일본책의 부록처럼 끝부분에 겨우 붙어 있었다.

이웃 친구에게 그 책을 전해줄 때 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어색해졌다.

그후부터 서점에 가면 때때로 '여행' 섹션에 들러 한국책이 있는지 보게 됐다.

88년 이후 단독으로 나온 한국 안내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런 안내책을 보면 으레 한국을 가리켜 '은자의 왕국 (Hermit Kingdom)' 이란 표현을 하고 있다.

조선말 쇄국주의시대의 표현을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든 미국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6.25 당시의 모습으로 굳어져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

마치 내가 아프리카의 '가나' 나 아시아의 '라오스' 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듯이. 서운하고 속상하지만, 사실이다.

한국을 아는 외국인은 참으로 적다.

세계인은 한국을 모를 뿐 아니라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각 나라가 저 먹고살기에 너무 바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사람들이 보는 한국' 이다.

마치 한국이 세계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무대 위에 서있는 것으로 느끼는 듯한 태도와 발언이 한국사람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온 첫마디가 '외국에 창피하다' 는 것이었다.

한낮에 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을 때도 그랬다.

마침내 IMF시대를 맞자 '치' 자 들어가는 단어는 모두 동원됐다.

수치,치욕, 국치 등. 누구도 심각히 거들떠 보지 않는데 혼자 주위를 살피며 부끄러워 하는 형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소식뿐인데, 거기에 보태는 말을 해서 송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한다.

어찌 보면 IMF도 '조금' 벌었다고 들떠서 외국을 오가며 거들먹거리던 정치군상들이 자초한 재앙일 수 있다.

한국은 이제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있다.

이때가 중요하다.

남아메리카에서도 일본인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좋은 인상을 심고 있는지 종종 듣는다.

개인 차원에선 친절과 겸손과 신의가, 정부나 기업차원에선 장기적 안목에서의 홍보가 그 비결인 것 같다.

한국은 이제부터라도 졸부의 거드름을 떨쳐 없애고 겸손과 친절과 신의를 지녀야 한다.

재미조각가 이태호<뉴욕에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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