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불사는 또 다른 위기의 씨앗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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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30면

로버트 루빈과 로런스 서머스가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그때 경제위기는 개발도상국 이야기였다.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도국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양한 안전장치가 만들어졌다. ‘바젤Ⅱ’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자산의 위험도를 반영해 은행의 안정성을 재는 표준화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이 시행될 즈음 은행들은 특수목적법인(SPC)이나 특별투자목적법인(SIV) 등 자회사에 위험 자산을 떠넘기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요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백지 위에다 금융 시스템을 다시 그리고 있다. 그 얼개가 최근 발표됐다. 아직 구체적인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도 논란이 뜨겁다. 미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은행뿐 아니라 “너무 많이 차입하고 너무 깊숙이 서로 연결돼 있어 위기에 빠지면 금융 시스템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모든 금융회사까지 감독한다”는 내용이 화근이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가 제거하지 못한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더욱 강화해줄 듯하다. 은행이든 보험회사든, 아니면 펀드든 덩치가 커 위기에 빠지면 시스템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라면 중앙은행이 나서도록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금융시장의 덩치 큰 플레어가 (정부를 믿고) 위험한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런대의 앨런 멜처는 “중앙은행이 덩치 큰 금융회사를 뒷받침하고 나서면 금융회사들은 특혜를 보게 되고 대중은 손해를 본다”며 “금융회사 임직원들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제학자는 오바마의 새로운 금융감독 시스템이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했다고 비판했다. 조지메이슨대의 아널드 클링 교수는 “오바마는 이번 위기가 규제받지 않은 금융회사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며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금융회사는 감시·감독을 철저하게 받은 국책 모기지회사인 패니메이나 프레디맥, 시중은행들이었다”고 꼬집었다. “이들 금융회사는 감독 당국의 코앞에서 위험한 게임을 서슴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런 비판과 지적에 비춰볼 때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규제안은 앞뒤가 뒤바뀐 듯하다. 먼저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 없애지 않고 규제를 강화하면 더 큰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대마불사를 위기의 원인으로 꼽는다. 거대한 금융회사들이 ‘우리가 망하면 모두가 다친다’는 오만함을 드러내며 위험한 게임을 벌였다. 이들은 위기가 발생하자 정부의 온갖 지원을 받았다.

씨티그룹과 패니메이·프레디맥·GM·크라이슬러 등은 거액을 지원받아 살아남았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에게 ‘덩치만 키워라! 그러면 정부가 책임진다’는 신호를 준 셈이다.

그 결과 일단 규모가 커진 금융회사는 시장에서 경쟁 회사보다 낮은 금리로 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싼 자금과 정부의 백업은 자연스럽게 경영진의 위험한 게임으로 이어질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사람들은 선한 의도를 갖고 규제를 통해 금융 시스템 안전도를 높이려 하지만, 그 규제 자체가 다음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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