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영명예회장 북한 방문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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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더군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 만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

정주영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둘째동생으로 7박8일 동안 함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순영 (鄭順永.76) 성우그룹명예회장은 귀환 직후인 23일 저녁 이같이 고향방문 소감을 밝혔다.

고혈압이 있는 그는 여독 때문인 듯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기자의 방문을 받고 깨어나 다소 수척한 모습으로 방북기간중 있었던 일을 2시간 넘게 차분히 술회했다.

방북을 앞두고 며칠간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일 만큼 가슴 설던 그였지만 막상 고향에 가 보니 53년 세월의 단절이 너무 컸다고 전했다.

정순영 회장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지난 45년 10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 (정봉식씨) 의 회갑잔치때 단 이틀간 들른 이후 무려 53년 만에 찾는 고향이었다.

내 나이 16세때 고향을 떠났으니 사실상 60년 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많이 변한 탓인지, 마을의 모습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형님 (정주영 명예회장) 이 89년 방문했을 때는 고향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를 보고 고향인 줄 알아봤다는데 그 감나무마저 웬일인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강원도통천군아산리 고향마을은 널찍한 대로를 한가운데 놓고 깔끔하게 단장된 기와집들이 줄 맞춰 서 있었다.

물이 하도 맑아 지나가던 서양선교사가 '베리 굿' 을 연발했다 해서 '베리꿋 개울' 로 불리던 마을앞 개천도 못 알아볼 만큼 말끔히 단장돼 있었다.

어린 시절 구불구불한 오솔길에 쓰러질 듯 서 있던 초라한 초가집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님이 손으로 돌을 골라 내며 한뼘 한뼘 일궜던 산비탈 텃밭도, 고향 앞을 지키던 남산도 알아볼 수 없어 서운했다.

우리 일행은 19일 원산에서 조그만 쾌속정을 타고 고향마을 어귀의 고저항 (庫低港)에 도착해 다시 승용차를 나눠 타고 4㎞를 달려 고향에 도착했다.

작은어머니와 50명 가량의 친척들, 그리고 큼지막한 환영플래카드가 우리를 반겼다.

꽤 활달하고 똑똑해 보이는 여자 통천군수도 나와 우리를 반겼다.

내가 알아본 사람은 작은어머니와 나보다 두 살 어린, 그러나 지금은 나보다 10년은 더 들어 보이는 어릴 적 친구, 단 두 사람뿐이었다.

동생인 세영이 (鄭世永 현대자동차명예회장) 나 상영이 (鄭相永 KCC회장) 도 마찬가지였고 89년에 왔다간 형님 역시 친척들을 잘 몰라봤다.

조카인 몽구 (鄭夢九 현대회장) 와 몽헌이 (鄭夢憲 현대회장) 는 처음 보는 아버지 고향이어선지 덤덤한 표정이었다.

시력이 안 좋은 작은어머니는 나를 보고 구분을 하지 못한 채 "네가 세영이냐 상영이냐. 나한테 업혀 다니며 울기도 많이 울던 네가 이제는 같이 늙어 가는구나" 하며 연방 눈시울을 닦았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얼굴도 모르는 사촌이 워낙 많아 일일이 소개받고도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마을사람들이 고향집에 식수할 감나무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우리 고장은 예부터 감나무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둘러봐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손자들이 올 때 번창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잘 자라 달라고 기원하면서 정성스레 감나무를 심고 물을 줬다.

이어 우리는 고향 뒷산의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성묘했다.

묘소로 가는 길이 가팔라 형님과 나는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가까스로 오를 수 있었다.

50여년 만에 조상을 모신다는 죄책감과 뭉클함이 밀려 오면서 비로소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조촐한 저녁잔치가 준비돼 있었다.

'이밥과 고깃국' 등 우리가 먹는 것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식단이었고 맥주까지 곁들여지는 등 상당히 세심하게 배려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먹는다" 며 자랑 비슷하게 말했다.

모르는 친척이 많아 다소 서먹서먹해서인지 노래가 오갈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는 끊임없이 우리 형제들의 어린 시절 애기들을 되살려 내며 좌중을 웃기곤 했다.

2시간여 얘기꽃을 피운 뒤 형님이 갑자기 "금강산초대소에 가서 자자" 고 나섰다.

그 날은 고향집에서 자기로 돼 있었는데 형님이 뭔가 착각한 듯했다.

작은어머니는 "주영아, 회포도 풀기 전에 네가 왜 그러느냐" 며 울면서 말렸다.

나도 하룻밤 자고 가자고 버텼으나 모두들 주섬주섬 나서는 바람에 결국 다들 금강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고향방문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내내 작은어머니의 눈물 흘리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저녁 무렵 고향집을 다시 찾아야 했다.

정리 = 이재훈.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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