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기업 선정 어떻게 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은행이 퇴출기업을 뽑는' 사상 유례없는 부실기업 선정작업은 기준과 일정 등을 놓고 두달여동안 관계기관과 은행 사이에서 혼선을 거듭해야 했다.

특히 '선정 강도' 에 대한 청와대측의 의지를 감독기관이 감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발표가 당초 일정보다 10여일 늦춰지면서 퇴출기업이 세배 가까이 늘어났다.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부실 대기업을 솎아낸다는 아이디어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지난 4월14일 제4차 경제대책조정위원회에서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은행들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달 7일 은행감독원이 주요 채권은행 여신담당 임원을 소집해 5월말까지 판정을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부터 금융기관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불평이 터져나왔으나 은행별로 위원회가 구성됐다.

지난달 10일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를 통해 부실기업 퇴출방침을 강조하면서부터 부실기업 선정작업에 가속도가 붙게 됐다.

하루 뒤인 11일 시중은행 간사은행인 상업은행은 사전예고 없이 은행 공동기준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퇴출기업의 수는 기껏해야 10여개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금융당국 관계자들도^IMF이전 금리수준이 연 10~12%인 정상금리에서도 생존이 불가능한 기업이 대상이 될 것이며^은행간에 이견이 있는 기업은 발표에서 제외시킬 것이라는 원칙을 밝혔다.

이에 따라 ^3년 연속 적자^차입금의 연간 매출액 초과^최근 결산일 기준 납입자본 완전잠식 상태 등을 기준으로 자체판정을 끝내고, 은행간 이견조정을 거쳐 지난 2일 확정된 부실기업 수는 20개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난 3일 금감위의 청와대 보고를 분수령으로 퇴출대상 부실기업 수가 급증했다.

金대통령 방미하루 전 이뤄진 이날 보고에서 金대통령은 명단을 보자마자 "5대 그룹과 협조융자 기업은 왜 빠졌나" 라며 "기대에 못 미치는 부실판정" 이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금감위측은 퇴출기업을 단계적으로 선정, 수차례에 걸쳐 발표한다는 복안을 세워두고 있었으나 청와대의 노기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와 은행들에 보완을 지시했다.

발표도 8일에서 18일로 늦춰졌다.

그러나 여신규모나 담보확보 여부 등에 따른 은행들의 이해관계가 여전히 충돌하면서 범위에 대한 이견이 노출됐다.

금감위는 토요일이던 13일 오후9시 은행 여신담당 임원을 긴급 소집, 5대 그룹 계열사에 대한 할당을 내리는 등 보완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내 17일 오전 5대 그룹 계열사 20개가 포함된 55개 퇴출기업 명단이 최종 확정됐다.

박장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