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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이즈미 피로'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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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에서 지난 11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 결과는 '자민당 패배, 민주당 약진'이었다. 전체 의석의 절반(120석)을 바꾼 선거였다. 여당인 자민당은 선거 전 50석에서 49석으로 줄고, 야당인 민주당은 38석에서 50석으로 늘었다. 선거 결과가 자민당의 정권 유지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민당은 종교기관인 창가학회의 지원을 받고 있는 공명당(10석 획득)과 연립하고 있다.

또 일본 의회에서 참의원은 중의원에 비해 의원수가 적고 권한도 매우 약하다. 따라서 일본 정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선거 한달 전만 해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郞)총리의 지지율은 상승세였지만, 이후 하락세로 돌아서 선거 전에 10%포인트 정도 떨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선거의 초점은 연금과 자위대 이라크 파견문제였다. 연금은 서민들의 관심사였다. 특히 자민당이 지난달 초 연금개혁법을 무리하게 통과시킨 게 문제였다. 고이즈미 총리가 과거 자신의 연금보험료 미납 사실에 대해 "인생은 여러가지"라고 말하면서 흐지부지 넘어가려 했던 데 대한 반발도 있었다.

이라크 문제는 주권이양과 관련, 파견돼 있던 자위대를 그대로 다국적군에 파견하는 것과 철군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지가 관건이었다. 또 고이즈미 총리가 구체적인 논의 없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석상에서 자위대의 참가를 혼자 결정한 점이 큰 문제였다.

북한의 납치 사건 피해자인 소가 히토미 가족 문제도 선거에서 주목받은 사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 방문 때 소가의 북한 내 잔류 가족인 남편 젠킨스와 딸 둘을 일본으로 데려오지 못했다. 대신 소가의 가족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재회했다. 그들 가족의 재회 사실은 선거 이틀 전인 지난 9일 극적인 형태로 보도됐다. 문제는 재회 시점이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선거에 유리하도록 이같이 조정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게다가 이번 재회극에는 북한도 적극 협력했다. 북한은 참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승리하기를 바란 것이 확실하다. 두번이나 북한을 방문, 북.일 국교 정상화에 의욕을 보인 고이즈미 총리를 측면에서 지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납치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피크를 넘어 줄어든 데다 '정치적 이용'이란 해석으로 재회극은 거꾸로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일본 국민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보인다. 총리 임기는 아직 2년 이상 남아 있다. 이대로 간다면 근래 보기 드문 장기 집권 정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 탄생 이후 3년여가 지난 지금 국민은 퍼포먼스보다는 내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연금.이라크 문제 등의 처리 방법이 문제가 됐고, 고이즈미 총리의 절묘한 언동은 이제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들은 양대 정당의 탄생에 기대를 갖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당도 새로운 정치 현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민주당의 내부 의견을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민당과 민주당의 정책 차이는 아직 명확지 않다. 따라서 정국의 캐스팅보트는 공명당이 쥐게 됐다.

시대는 포스트 고이즈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향후 정국 흐름에 따라 고이즈미 정권이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고이즈미로선 지금이 그동안 최대 정치공약으로 내세웠던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일 수도 있다. '자민당 개혁'을 공언해 지지율을 높였던 고이즈미 총리다. 그가 지지율을 회복하는 길은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체제를 향해 개혁해 나가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고쿠분 료세 일본 게이오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정리=오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