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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끈 후에는 허리띠 졸라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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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급한 불을 끌 때는 먹을 물까지 아낌없이 퍼부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불이 꺼지면 부지런히 물을 길러 물통을 채워야 한다. 물을 퍼붓는 건 쉽지만 멀리 떨어진 샘에서 물을 길어다 채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상황이 다소 좋아지면서 이른바 ‘위기 이후 출구전략’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정부는 아직 재정금융 정책의 기조를 바꿀 단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국은행도 금융완화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섣불리 긴축으로 돌아서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경제위기 이후의 출구전략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풀린 돈을 흡수하고 금리를 올리면서 재정지출을 줄이는 게 일반적 해법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도하게 풀린 나랏돈 씀씀이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통화정책은 비교적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재정긴축은 소리만 요란하거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흔하다. 재정정책 특유의 불가역성(irreversibility)과 시차성(time lag)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대비해 나가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나라 살림 형편이 최근 들어 가파르게 나빠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올해에 35%를 넘고, 내년에는 40%에 다다를 전망이다. 아직은 건전하다고 하지만, 앞으로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진행 중인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엄청난 복지비용이 입을 벌리고 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통일비용도 생각해야 한다. 주택공사, 토지공사, 도로공사 등 공기업의 빚 역시 앞으로 부담해야 할 몫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교훈이 보인다. 한국이 비교적 경제위기를 빨리 벗어난 것은 확대재정 정책을 적기에 충분히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고도성장 전략을 뒷받침하느라 재정적자가 늘어났다. 80년대 초에는 만성적 인플레, 부동산 투기, 국제수지 악화 등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다. 하지만 제로베이스 예산제도와 예산규모 동결을 통한 튼튼한 재정으로 80~90년대 안정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도 건전한 재정 덕분에 과감한 확대재정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폭적인 감세조치에 따른 세수감소는 2012년까지 누적적으로 확대되어 나타날 것이 확실하다. 올해 1분기 세수는 이미 16% 줄었다. 반면 씀씀이를 줄일 곳은 눈에 띄지 않는다. 복지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국방비도 최근의 남북상황을 볼 때 늘어날 수밖에 없다. 농어촌 지원 예산은 자유무역협정과 맞물려 증액 요구가 거세고 4대 강 정비사업 추진 등으로 사회간접자본 예산을 줄이기가 쉽지 않다. 특히 미래를 대비해 인재양성과 연구개발(R&D) 투자도 늘려나가야 한다.

비어가는 나라 곳간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우선 지출부터 줄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예산에는 주인이 있다’는 말이 있다. 각기 이해관계자들이 있다는 의미다. 일단 늘어난 예산을 줄이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정부가 지출을 늘리거나 세금을 줄이면 미래의 국민 부담으로 귀착되지만, 당장에는 그 혜택을 받는 현 세대 사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이다.

정부 지출을 줄이려면 예산 당국자는 우선 욕먹을 각오부터 필요하다. 정치권도 도와줘야 한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앞서면 건전재정은 물 건너간다. 내년 예산안을 본격적으로 짜는 시기가 다가왔다. 올해 여름에는 예산을 더 따기 위해 밀고 당기기보다는 적은 예산을 잘 쓰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반장식 서강대 교수·전 기획예산처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