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룹분해 벼랑끝에 몰린 박건배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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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해태그룹의 박건배 (朴健培.50) 회장.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룹 총수에 올라 15개 계열사를 일군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

재벌의 흥망성쇠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朴회장에게 쏠리는 세간의 관심은 뜨겁다.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공중분해' 를 연출하는 비운의 첫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朴회장의 근황이 궁금해 6일 밤 서울 이태원 朴회장 자택을 찾았다. 대문을 열어줄리가 만무해 朴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를 팔아 간신히 집안에 들어섰다. '불청객' 의 신분이 기자로 드러나자 朴회장은 몹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며 몇번이고 대화를 사양했다.

朴회장이 말문을 열기까지는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나중에는 "편하게 얘기하자" 며 소파에서 거실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朴회장은 "해태제과만큼은 살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는 표현을 수차례 써가며 '해태' 브랜드에 강한 애착을 나타냈다.

- 요즘 심경이 복잡할텐데.

"회사를 이렇게 만들다보니 죄스러운 심정 뿐이다. 제과까지 넘어간다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창업하신 선친과 해태 관련자들을 뵐 면목이 없을 것 같다. 사람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워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

- 채권은행단으로부터 언제 최종통보를 받았나.

"지난 1일 오전9시 조흥은행으로부터 통보받았다. 은행이 해태제과까지 해외매각하는 1안을 선택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 은행 결정을 번복해달라는 얘기인가.

"해태제과는 우량기업이다. 비록 부도는 났지만 영업이익이 한달에 1백20억~1백30억원씩 난다. '맛동산' 은 한달에 60억원 어치나 팔린다. 살려두면 나중에 은행 빚을 갚을 수 있다. 은행이 이런 점을 배려해주지 않아 서운하다."

- 제과.음료.유통 3개 계열사를 모두 팔아도 매각대금 (1조5천억원) 으로 부채 (2조3천억원) 를 갚기에 모자라지 않는가.

"은행으로서야 당연히 부채회수에 역점을 두고 제과까지 매각대상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해태제과는 중화학공업을 하는 회사와 성격이 다르다.

해방둥이로 53년간 코흘리개부터 어른까지 국민과 밀착해 사랑받으며 자라온 기업이다. 어려운 시기에 외국자본을 들여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태라는 토착 브랜드가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은행측에 해태제과를 출자전환으로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

- 종금사들은 해태제과를 살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은행측과 재협상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처리방향이 바뀔 변수가 되지 않을까.

"종금사는 담보가 없다보니 입장이 다른 것 같다. 종금사로서는 해태제과에 대해 출자전환해 경영이 정상화되면 적어도 5천억원은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결정내용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결론이 신속히 이뤄졌으면 한다. 늦어지면 직원들 사기는 물론 자산가치도 떨어진다. 부도상태가 오래돼 자칫하면 법정관리로 가는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

- 경영을 어디에서 잘못했다고 보는가.

"상사에 손을 댄 게 결정적 패착이었다. 해태상사를 만들어 여러 품목을 취급하다보니 여기저기에서 돈 될만한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전자.중공업에다 건설에까지 손을 댔으니 되돌아보면 여간 잘못된 게 아니다. 한 우물만 팠어야 하는데 후회가 막심하다. "

- 계열사 매각작업은.

"해태음료는 외국투자회사와 이미 의향서를 교환했고, 조만간 계약이 이뤄질 전망이다. 해태유통은 홍콩의 다국적 유통업체인 데일리팜을 비롯해 몇몇 회사가 관심을 갖고 있다. "

- 해태음료는 코카콜라가 산다는 소문도 많았다. 사실인가.

"코카콜라도 관심을 갖고 두차례 접촉해왔으나 확답은 없다. 경쟁관계인 음료회사로 넘어가면 종업원 보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직원들에게는 고용안정이 최우선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코카콜라보다는 외국투자회사로 넘어가는 게 종업원을 위해서라도 낫다는 생각이다. "

- 값은 제대로 받는가.

"부도라는 약점 때문에 값을 후려쳐 애를 먹었다.

지금은 얼마냐가 문제는 아니다.

자구노력의 성의를 보여주는 게 더 급해 매각을 서둘렀다. "

- 해태타이거즈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과 없는 타이거즈는 의미가 없다. 타이거즈를 유지하려면 한 해에 70억원이나 들어가는데 홀로 설 수 있겠느냐. 광주시민들께서 도와주겠다는 말은 정말로 고맙지만 그렇다고 내 입장에선, 더구나 해마다 손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

- 집도 은행담보로 잡혔다는데.

"일 (부도) 이 터지니까 은행이 무섭더라. 별의별 곳에 2중.3중으로 가압류가 들어왔다. 주식.선산.집까지 모두 잡혔다. 평소에 모르고 지내던 재산을 은행 덕택에 찾았을 정도니까. 최악의 경우엔 동부이촌동 어머니 집에 들어갈 각오다. "

朴회장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재벌 회장쯤 하면 재산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라고 첨언을 자청했다.

그는 "기업하면서 개인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해왔다" 며 "숨겨둔 재산은 한푼도 없다" 고 말했다.

朴회장은 실제로 직원들 사이에 술값 영수증을 회사에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회사 돈에 엄격한 '샌님' 으로 통한다.

창업보다 수성 (守成) 이 더 힘들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모습 한편으론 자책감이 그를 괴롭히는 듯 했다.

朴회장이 과연 채권은행단의 막판 배려로 해태제과를 살릴 수 있을지, 아니면 모든 걸 훌훌 털고 '공수거 (空手去)' 할지 관심이다.

이종태.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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