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분수대

남북 축구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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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70년대까지 축구인들에게 남북 대결은 한·일전보다 두려운 경기였다. 자존심을 넘어 ‘죽어도 질 수 없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65년.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참가를 선언하자 한국은 불참을 선택했다. 혹시 질지도 모르니 아예 안 붙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선을 통과한 북한은 이듬해 본선에서도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해 세계 축구에 파란을 일으켰다. 충격을 받은 한국은 전열을 정비해 70년 멕시코 월드컵에 도전했지만 이번엔 북한이 발을 뺐다.

북한 축구가 처음 아시안게임에 등장한 74년 테헤란. 대회 개막을 2주 앞두고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서거한 뒤끝이었다. 굳이 북한과 위험천만한 대결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고, 한국은 대회 내내 북한과의 대진에만 신경 쓰다가 석연찮은 연패로 수상권에서 멀어졌다.

4년 뒤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수퍼스타 차범근을 앞세운 한국은 대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양팀은 승승장구 끝에 결승에서 맞붙었고 접전 끝에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이 결정됐다.

시상대에서도 신경전은 계속됐다. ‘한국축구 100년사’에서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김호곤(현 울산 현대 감독)은 “북한 주장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했지만 그는 내가 올라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골키퍼는 나를 밀어 떨어뜨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김호곤은 “우리 손 잡읍시다”고 제의,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뒤로 남북 대결은 흔한 일이 됐고 긴장은 사라졌다. 오히려 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최종전에서 북한은 한국에 0-3으로 대패, 한국이 기적적으로 일본을 제치고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지난해 열린 남아공 월드컵 1차 예선에서 북한은 평양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들일 수 없다며 남한과의 홈 경기를 거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렇듯 지난 반세기 간의 남북 축구 대결사는 양자 간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압축해 보여 주는 듯하다. 곡절 끝에 남북한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사상 최초로 동반 진출하게 됐다. 그저 본선에서도 양측 모두 선전을 거듭해 78년의 어깨동무가 재현되길 바랄 뿐이다. 

송원섭 JES 엔터테인먼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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