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겨 달라” “최선 다할 것” … 남북 ‘화해의 골’터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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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남아공 함께 간다

남북, 월드컵 첫 동반 진출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 박지성(28·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발끝에서 터진 한 골이 북한의 남아공행 길을 활짝 열어줬다. 한국이 박지성의 동점골로 이란과 1-1로 비긴 덕분에 북한은 18일(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0-0으로 비기고도 본선 직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B조에서 북한은 사우디와 3승3무2패(승점 12)로 동률이 됐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한국에 이어 조 2위로 본선에 올랐다.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 북한 대표팀 스트라이커 정대세(25·가와사키·작은 사진)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남북한의 2010 남아공 월드컵 동반 진출이 경색된 남북 관계에 훈풍을 몰고올 수 있을까.

북한이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낸 것은 그들이 땀 흘린 대가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측면 지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미 조 1위로 본선행을 확정한 한국이 아시아 예선 마지막 사우디아라비아·이란 전에서 한 경기라도 포기했더라면 북한의 월드컵 진출 염원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절박했던 북한의 입장에선 한국의 전력투구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점들이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면서 협력 관계로 나타날 수도 있다.

◆“꼭 이겨 달라” 부탁에 총력전 펼친 한국=일본 J-리그에서 뛰고 있는 이근호(주빌로 이와타)는 사우디와 이란전을 앞두고 북한 대표팀 스트라이커 정대세(가와사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대세는 “두 경기 모두 큰 점수 차로 이겨 달라.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이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도 지난 4일 바하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 북한 대표팀 관계자로부터 “사우디와 이란을 꼭 이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국이 이들을 잡아줘야 같은 조의 북한이 본선행 티켓을 따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10일 사우디와 득점 없이 비긴 한국은 17일 이란 전에 베스트 멤버를 동원했다. 한국으로선 이미 본선 티켓을 확보한 상태라 주전을 혹사시킬 이유가 없었다. 부상의 염려도 있었다. 박지성·기성용(서울) 등 이미 한 차례 경고를 받은 선수들이 다시 옐로 카드를 받으면 본선 첫 경기 출전도 불투명했다. 그래도 한국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고 박지성의 동점골로 이란과 1-1로 비겼다. 이란이 비겼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은 작정하고 ‘비기기 작전’으로 나왔고, 사우디의 파상공세를 끝까지 막아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적지에서 사우디와 0-0으로 비겨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 북한 선수들이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리자 펄쩍펄쩍 뛰고 서로 껴안으며 감격을 나누고 있다. 스트라이커 정대세(왼쪽에서 셋째)는 아예 웃통을 벗은 채 동료를 끌어안았다.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 AP=연합뉴스]

◆단일팀은 난망, 공동 응원은 가능=남북한이 나란히 남아공행 티켓을 따냄으로써 ‘남북 단일팀’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단일팀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이 44년 만의 월드컵 진출이라는 ‘경사’를 단일팀이라는 이슈로 희석시킬 이유가 없고, 한국도 반길 이유가 없어 보인다. 조중연 축구협회장도 “영국도 팀 수를 늘려서 나가려고 하는데 두 팀을 한 팀으로 줄이는 건 좋지 않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공동 응원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남아공 현지 교민과 한국의 원정 응원단이 양 팀 경기에 모두 응원을 펼칠 수 있다. 남북한 합동 훈련도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대한축구협회 유영철 홍보국장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마음을 열고 북측과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북한은 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12월 조 추첨 이후 북한과 같은 조에 속한 팀들이 한국과 평가전을 갖기를 원하고, 한국과 같은 조 팀들은 북한과 평가전을 희망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은 월드컵 공동 진출로 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평가전 상대로도 몸값이 올라가는 소득을 얻게 됐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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