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상황 따라 말 바꾸는 카멜레온 북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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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2002년 10월 4일 오전. 평양의 만수대의사당 회의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전날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의 예상을 깨고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밤샘 대책회의 끝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을 보내 켈리 차관보에게 북한의 입장을 통보했다.

“우리는 악의 축이고, 미국은 신사(gentleman)인 것이 현 양국 관계의 본질이다. 우리는 신사가 하는 것처럼 현안들을 다뤄 나갈 수 없다. 미국의 압력으로 무장해제하면 우리는 탈레반같이 얻어터져 죽을 것이다. 미국과 대화하려면 우라늄 농축이든 핵무기든 레버리지가 필요하다.” (미 방북단 일원이었던 찰스 프리처드가 저술한 『실패한 국가』) 제2차 북핵 위기를 가져온 우라늄 농축을 사실상 시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1차 6자회담 때부터 북한은 우라늄 농축을 완강히 부인한다.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있다는 얘기는 ‘일심단결’을 의미한 것” “미국 적대세력의 날조”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5년이 지난 2008년, 핵 프로그램을 신고할 때도 “없는 것을 어떻게 있다고 하느냐”고 잡아뗐다. 그러더니 몇 달 만에 태도를 바꿔 “우라늄 농축 기술개발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시험단계에 들어섰다”고 국제사회에 협박을 가했다.

북한 말바꿈 사례는 수도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5년 6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유효하며 이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990년 한 일본 정치인과의 면담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기술도 자금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올해 1월부터는 ‘미국과 수교를 해도 핵은 보유하겠다’며 이전 언급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왜 상대해 주지 않느냐’는 엉뚱한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핵 문제뿐이 아니다. 85년 8월 평양에서 열렸던 제9차 남북적십자회담 때의 일이다. 당초 합의된 일정은 소년학생궁전 방문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전 “모란봉경기장으로 가자”고 일정 변경을 통보했다. 이유는 “학생들이 준비한 무용이나 체조를 보여주는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모란봉경기장에 등장한 행사 중의 하나는 미군 복장을 입고 누워 있는 학생들을 총검으로 찌르는 퍼포먼스였다. 남측 대표단이 항의 표시로 퇴장하려 하자 북측은 “몇 달을 고생한 어린 학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180도로 태도를 바꾸는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카멜레온적 태도야말로 북한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가 북한을 바라볼 때 이 점이 간과돼선 안 되며, 특히 북한과의 협상 때 이 대목을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비한 만전의 응전태세를 갖추는 한편으로 대화 노력 또한 포기할 순 없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양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앞의 협상 결과에만 급급해 북한 체제의 본질에 눈을 감다간 북한에 번번이 놀아나기 십상이다. 노무현 정권은 ‘미국도 우라늄 농축에 관해선 정확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더라’면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북한 스스로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뒤집었으니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런 바보짓이 또다시 되풀이돼선 안 된다.

안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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