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예멘선 한 달 한두 번 외국인 납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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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예멘에서 테러단체에 살해된 엄영선(34·여·사진)씨의 아버지(63)와 여동생(31)은 예멘으로 출국하기 위해 16일 오후 수원시 세류동 집을 나섰다. 아버지 엄씨는 집 앞에 있던 취재진에게 “오늘 오전 외교부로부터 딸이 죽었다는 것을 연락받았다”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날 저녁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동네 주민들은 “봉사하러 간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안타까워했다. 한 40대 여성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혜신(27·여)씨는 “국제단체가 봉사활을 할 때 안전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살해된 엄씨는 수원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대전 침례신학대(유성구 하기동)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국내 초등생 영어학습지 교사로 일했다. 이날 대학 측은 교문 2곳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검은색 현수막 2개를 내걸었다.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도 사이버 조문 코너를 만들었다.

포털사이트에 있는 엄씨의 블로그 ‘Pilgrim a traveling soul(순례자 여행하는 영혼)‘에는 수백 개의 추모 글이 올라왔다. 네티즌들은 검은 리본 표시(▶◀)와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비는 추모 글을 남겼다. 네티즌 ‘아롱이’는 “헌신적인 사랑이 작은 씨앗이 되어 님이 품었던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는다”고 썼고, ‘휴머니스트’는 “종교의 굴레를 넘어 휴머니즘을 실천한 고인께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테러행위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한 네티즌은 “한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일반인과 봉사자를 죽일 수는 없으며 이는 명백한 살인행위”라고 지적했다.

여행 자제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갔던 엄씨의 행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네티즌 ‘한려’는 “가지 말라고 하는 데는 안 갔으면 이런 일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일부 네티즌은 “블로그도 하나의 문상집인 만큼 비판은 다른 곳에서 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포털 측은 이날 오후 4시부터 엄씨의 블로그에 대해 접근 제한 조치를 취했다. 포털 관계자는 “정오쯤 유족이 접근을 막아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며 “고인의 사진과 개인정보 등이 인터넷에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엄씨는 2008년 8월 출국 후 피랍되기 전까지 예멘 생활을 담은 글을 블로그에 올려 왔다. 올 1월 영문으로 올린 글에서는 한국인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신의 일상을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엄씨는 “한 달에 한두 번 외국인 아이가 납치되고 있다. 종종 수도 사나로 가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가호를 빈다”며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납치됐을 때는 당시 상황을 다룬 BBC 뉴스를 스크랩하며 납치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글을 올렸다.

수원·대전=김방현·이현택 기자,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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