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급박했던 하야 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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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군은 더 이상 대통령을 지지할 수 없게 됐습니다. "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군 수뇌부가 전달한 이 한 마디로 32년간 머물렀던 권좌를 내려와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카르타 현지와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수하르토는 사임을 발표하기 전날인 20일 밤까지 '총선후 사임' 이라는 각본으로 권력 유지를 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이를 위해 수다르모노 전 부통령을 관저로 불러 국민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다음날 발족할 예정이던 '개혁위원회' 에 참석토록 요구하는 등 준비작업에 열중했다.

이같은 그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20일 밤 늦게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군 수뇌부와의 면담. 학생들의 정치개혁 요구에 전향적 성향을 보여왔던 국방장관 겸 군총사령관 위란토는 이 자리에서 "더 이상의 억압은 곤란하다" 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다는 군 수뇌부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앞서 위란토는 군 수뇌부의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해 수바기오 육군사령관을 비롯, 해.공군 사령관과 경찰군 사령관을 참석시킨 회의를 열고 수하르토에게 '대통령 가족의 신변안전' 을 전제로 퇴진을 촉구키로 최종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란토는 이어 대통령 옹호세력인 수하르토의 사위 프라보위 전략사령관 등에게 이같은 결정사항을 통보, 이들로부터 "간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 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군내부의 사전조율 작업을 모두 마친 위란토 국방장관과 육.해.공.경찰군 사령관 등 군 수뇌부는 바로 대통령 관저로 수하르토를 방문해 사퇴 촉구의 뜻을 전달했다. 수하르토는 이같은 위란토의 발언을 듣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으나 군 수뇌부의 확고한 뜻을 감지한 뒤 사임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하르토 권력의 최대 버팀목으로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던 군부가 어떤 배경에서 갑자기 등을 돌렸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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