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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최수부는 왜 국민을 못 믿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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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최수부 회장이 TV에 나와 이렇게 선언했다면 ‘광동제약 협박사건’은 어떻게 됐을까. 말없는 국민은 회사를 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한 단체는 사람들의 함성에 놀라 뒷골목 쥐구멍으로 숨어들었을지 모른다. 부당한 일을 보면 한국인은 힘을 모아 응징하곤 했다. 1970년대 많은 시민은 광고 탄압을 받던 동아일보에 격려광고를 몰아주었다. 87년엔 독재정권의 ‘호헌(護憲)’ 위협에 분연히 일어섰다. 말없는 다수는 옳은 일을 결코 생략하지 않는다.

광동제약의 굴욕은 국가의 정신사(史)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다. 46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수한 기업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이상한 단체의 협박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회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그저 부수가 많고 광고효과가 큰 매체를 골라 광고를 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단체는 불매운동 하겠다며 협박했고 회사는 수시간 만에 백기를 들었다. 우쭐해진 단체는 이번엔 국내 1위 기업을 골라 협박하고 있다. 산업화·민주화·경제·스포츠에서 세계인을 놀라게 한 이 경이로운 나라에서 백주에 이런 원시적인 협박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은 자본주의나 시장경제 이전에 공동체의 정신에 관한 문제다. 국민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최수부 회장은 그런 점에서 국민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광동제약 협박 같은 일이 벌어지면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정부는 이런 행위가 공갈이나 강요, 업무방해에 해당되지 않는지 즉각 조사해야 한다.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는 야만적인 행위를 규탄해야 한다. 여론은 비겁한 협박자를 크게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업이다. 기업은 말없는 다수 소비자를 믿고 싸워야 한다. 일시적으론 매출이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소비자는 기업의 의연함에 끌릴 것이고 매출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영혼이 있는 기업이라면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정의와 이성(理性)에 대한 확신이다.

최 회장은 TV에 소개될 정도로 인간승리 모델이다. 학력은 초등학교 4년이 전부다. 그는 신뢰 하나로 사업을 키웠다고 한다. TV광고에서 그는 ‘40년 최씨 고집’을 강조했고 많은 이가 이 말을 기억한다. 자서전 『뚝심경영』에서 그는 “힘들고 괴로워도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다. 정작 자신은 왜 버티질 못했는가. 그는 “기업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려 했다. 그런데 이사들이 ‘매출에 타격이 심할 것’이라며 요구 수용을 간곡히 건의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사회 풍토에서 어떻게 기업을 해야 할지 참으로 마음이 상했다”고 한탄했다. 회사의 생존을 위해 그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 더 생각해야 했다. 말없는 다수를 믿어야 했다.

부당한 보이콧(boycott·불매운동)에 시달리는 기업을 돕자는 운동이 ‘안티 보이콧’이다. 2005년 9월 덴마크의 어느 신문이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풍자하는 만화들을 실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살인·테러가 이어졌고, 2006년 1월엔 “덴마크 제품을 사지 말자”는 대규모 보이콧이 시작됐다. 어떤 덴마크 기업은 하루에 수백만 달러의 피해를 보았다. 덴마크 기업들이 위기에 몰리자 유럽에선 ‘Buy Danish’ 캠페인이 벌어졌다. 덴마크 물건을 더 사주자는 거였다. 웹사이트·블로그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덴마크 국기를 달고 다녔다. 서부영화 ‘하이 눈(High Noon)’은 부당한 위협에 굴하지 않는 보안관의 스토리다. 미국인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자란다. 21세기의 보안관은 부당한 압력에 맞서 사회의 영혼을 지켜내는 사람이다. 최수부 회장은 보안관이 될 기회를 놓쳤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