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중수부장의 탄식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이 12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후 기자실을 떠나고 있다. 왼쪽부터 이 중수부장, 홍만표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 박종근 기자

지난 3월 20일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은 ‘박연차 게이트’의 문을 열며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인용했다.

“4월은 (정치권에) 잔인한 달.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빗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돌발 변수 때문이다.

12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 기자실에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이 중수부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보도자료를 10분간 담담히 읽어 나갔다. ‘노 전 대통령 뇌물 수수 의혹 사건’ 항목을 읽던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검찰은 이번 수사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음을 말씀드립니다.”

검찰 발표문에는 이례적인 표현도 들어 있었다. “수사가 완결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심에 따라 공소권 없음 처분을 했다. 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께서 갑자기 서거하신 점을 매우 안타깝고 애통하게 생각한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발표가 끝나고 기자와 잠깐 만났다. 그는 “내 인생에 이런 일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7명 구속, 14명 불구속 기소 ‘역대 최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12일로 막을 내렸다. 지난해 11월 25일부터 수사 결과 발표 때까지 200일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검찰은 수습이 곤란할 정도의 상황에 몰려 있다.

외견상으론 검찰의 수사 성과가 적지 않아 보인다. 현역 국회의원 5명, 전직 국회의장 2명을 비롯해 청와대와 국회·법원·검찰·경찰·지방자치단체의 전·현직 고위 인사 30여 명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금품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 중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재 민주당 의원 등 7명이 구속 기소됐고,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등 14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역대 게이트 중 사법 처리자 숫자로는 최대 규모에 속한다. 이른바 ‘정태수(전 한보그룹 총회장) 리스트’가 등장했던 1997년의 ‘한보 사건’ 때는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 가운데 8명을 포함해, 모두 18명이 기소됐다.

로비 규모도 막대하다. 박 전 회장이 뿌린 돈은 70여억원이다. 노 전 대통령 측에 건넨 640만 달러와 내사 종결 처분된 사람들이 받은 돈까지 모두 합치면 박 전 회장이 뿌린 돈은 135억여원에 이른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던 박연차 전 회장의 구명 로비 부분도 비교적 소상하게 드러났다. 수사 발표와 함께 공개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공소장에는 세무조사를 받던 박연차 전 회장의 구명 청탁 전말이 비교적 자세히 담겨 있었다.

지난해 8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의 세무조사가 본격화하자 박 전 회장은 천 회장을 찾아가 “형님이 이번 세무조사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형님이 책임지고 해 주십시오”라고 청탁한 것으로 공소장에 나타나 있다.

천 회장은 곧바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을 만나 “박연차는 내 동생 같은 사람이니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박 전 회장은 같은 달 대한레슬링협회장인 천 회장이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중국 베이징에 가 있을 때엔 숙소인 S호텔로 찾아가 또 한 번 청탁을 했고, 천 회장은 한 전 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금은 얼마라도 낼 테니 검찰 고발은 말아 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그해 11월 중순까지 천 회장은 한 전 청장에게 수십 차례 전화를 걸어 부탁을 계속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러나 국세청은 결국 박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천 회장은 그때부터는 박 전 회장의 측근들에게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사면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림에선 실패한 수사”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이번 수사는 큰 그림에선 ‘실패한 수사’라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현직 검찰 고위 간부는 “큰 고래를 생포했으나 고래가 죽는 바람에 고래는 버리고, 상처뿐인 빈 배만 몰고 돌아왔다. 헛수고만 하고 돌아온 배의 돛대마저 부러져 재항해가 불가능한 상태인데 선장은 사라지고 수리공 또한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수사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듣게 된 데는 역시 노 전 대통령 서거가 결정적이었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으나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책임론에 시달리는 중이다. 저인망식 수사, 사법 처리의 실기, 과도한 피의 사실 유포 및 수사 기밀 누출…. 모두 검찰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이다. 검찰은 정치 보복 수사 내지 과잉 수사란 지적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검찰이 미리 밑그림을 짜놓고 시작한 게 아니라 국세청의 고발 내용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의 비리 단서가 포착됐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진행된 것이었단 얘기다.

대검의 한 간부는 “지난해 12월 구속된 박 전 회장이 ‘노무현·박관용·김원기·이광재 등 5명’의 이름을 대면서 ‘이들을 수사할 수 있다면 나를 치라’고 큰소리를 쳤고, 이때부터 수사의 단초가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나 그의 가족, 주변 인물에 대한 저인망식 수사라는 지적에는 “박연차 회장과 관련된 금품 수수에 한정해 조사했고, 노건호씨 등의 경우 진술을 번복해 조사 횟수가 늘어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날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관련한 수사 기록은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표문에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인정되지만~”라는 표현을 담았다. 이러한 검찰의 수사 발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변호인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변호인단은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혐의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책임 회피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검찰의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책임론 부담 안은 검찰
수사 결과는 발표됐지만 검찰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정치권에선 특검 얘기가 나오고 있다. 200일이란 긴 시간을 수사하면서도 ‘재수사’ 명분을 남겨 놓은 셈이다. 법정 다툼도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박 전 회장은 지난 11일 열린 이광재 의원의 공판에서 이 의원에게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면서 “이 의원에게 돈을 주려고 했는데 계속 거절해 그냥 놓고 나왔다. 그걸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진술했다.

만약 기소된 21명 가운데 주요 인사들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지면 검찰은 두 번 상처를 받게 될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검찰 조직 내부가 불안정하다. 민주당은 법무부 장관·대검 중수부장 파면, 박연차 수사 국정조사 등을 국회 등원 조건으로 내걸고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대검 중수부 해체, 공직비리수사처 도입 등의 논의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1차장을 지낸 박만 변호사는 “제도 개혁도 좋지만 부정부패 수사가 위축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