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사태 진세근특파원 르포9신]한인 점포들 곳곳 잿더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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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시위에다 물가인상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겹쳐 폭발한 인도네시아 사태가 점차 앞뒤 가리지 않는 폭동으로 변질되는 조짐에 적지 않은 현지인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軍30명 호위속 폭동지역 취재= 특히 14일밤 자카르타시내 백화점에서의 대량 인명피해사태는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가 상호작용해 발생한 대참사였다.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가운데 군중폭동이 기승을 부리자 일부에서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치안확립에 중점을 두고 사태수습을 추진해 소요를 가라앉히고 개각 등을 통해 무난히 위기를 넘길 것으로 보는 시각도 나왔다.

물론 대학생들이 네덜란드 식민치하이던 1908년의 학생시위를 기리는 오는 20일의 '민주 봉기의 날' 을 기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도 있고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변수여서 사태의 향방을 속단하기는 어렵다.

기자는 16일 새벽 인도네시아 헌병 10명, 특전대원 20명이 각각 탑승한 트럭 두 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폭동이 계속되고 있는 자카르타시 북부 탕그랑지역에 들어갔다.

한국교민들의 피해는 예상보다 심했다.

신라식당.가라오케 등 한국인이 경영하는 여러 점포들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교민들은 전했다.

*LG직원 "이곳 오며 7번 털려"= "지붕이 날아간 채 시커먼 흉물로 변한 사무실을 보고 기가 막히더군요. 미화로 1만달러 가량 날렸지만 돈은 둘째입니다.

우선 아내와 아이들만이라도 먼저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 화공약품가게를 폭도들에게 방화.약탈당한 김진국 (金鎭國.29) 씨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만난 김중민 (金重敏.33) 씨는 "신발 원자재를 팔러 왔다가 폭동을 만나 3일 동안 임페리얼호텔에 감금돼 있었다.

호텔창문을 통해 슈퍼마켓.극장.은행들이 털리는 광경을 보니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 고 증언했다.

金씨는 "호텔에서 만난 한 LG직원에게서 '14일 자카르타에서 탕그랑으로 오는 길에 무려 일곱번에 걸쳐 폭도에게 털렸다' 는 말을 들었다" 고 전했다.

같은 날 공항에서 자카르타로 들어오던 한국남방개발 (KODECO) 의 배상경 (裵相璟) 부회장은 폭도들이 차에 던진 돌에 귀밑이 찢어지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탕그랑지역은 상가마다 인도네시아 국기를 반기로 게양해 내국인임을 표시하고 있었고 문에는 'Milik Pribumi' (현지인 소유) 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김중민씨의 차량에도 똑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약탈을 피해 보려는 안간힘이다.

그는 "은행과 가게를 다 턴 폭도들이 이제 아파트나 부촌 등 가정집으로 몰려들고 있다.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고 한탄했다.

*商街 문마다 '원주민 소유' 벽보= 이에 앞서 기자는 자카르타 서부 메르데카 자야가 (街) 수리드라 산부인과병원의 간호사 아리 (24.여) 를 만났다.

"그들 (폭도) 이 14일밤 갑자기 병원에 뛰어들었어요. 산모들이 누워 있는 병실문을 열어 젖히고 값 나갈 만한 기자재.소지품은 물론 아기우유까지 쓸어 갔어요. " 아리양이 기억하는 악몽의 순간이다.

그녀는 바로 직전 병원바깥 상가에서 군중들이 전자제품가게를 터는 것을 목격했으나 설마 병원에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산모는 기절하기도 했어요. 아기를 들어 안고 무조건 달아나는 산모도 있었고…. " 그녀는 정신 못 차리는 산모 3명을 무조건 잡아 끌고 나와 지나가던 승합차의 도움으로 부근호텔로 몸을 피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카르타 = 진세근 특파원 〈sk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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