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황기성사단 새 로맨틱코미디 '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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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영화사 '황기성 사단' 은 '사단장' 인 황기성 사장의 장악력이 압도적이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는 그는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편집을 손수 지휘할 뿐 아니라 작품의 아이디어와 제목을 정하는 데도 웬만한 젊은이들 보다 더 '튀는' 감각을 자랑한다.

주변에서 모두 고개를 저을 때도 그는 '닥터 봉' 이라는 이름을 고수해 성공했고 그 여세를 '고스트 맘마' 에까지 몰아붙여 영화사의 기반을 다지면서 확실하게 재기했다. (황기성은 15년전 '고래사냥' 을 제작했다. ) '고스트 맘마' 의 한지승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춰 내놓은 '찜' 에서도 여전히 그의 입김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연하 남성과 연상 여성간의 사랑' 이라는 변화한 시대 흐름을 재빠르게 소재로 택한 건 물론이고 '원하는 걸 미리 점 찍어놓는다' 는 뜻을 가진 '찜' 이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단어를 영화 타이틀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젊은 감각 덕이었다.더구나 이야기가 맹숭해 질 걸 염려해 남자주인공을 여장 (女裝) 시키기로 한 건 평소에 비디오나 영화를 챙겨보면서 영상감각을 가꿔온 그가 아니었다면 쉽게 떠올릴 수 없었을 착상이다.

방송국에서 어린이 프로의 조연출을 맡고 있는 준혁 (안재욱) .그는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 한 눈에 반한 친구 누나인 채영 (김혜수)에 대한 짝사랑으로 괴로워한다. 그녀는 화장품회사에서 향수연구원으로 일하는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이다.

준혁은 사랑을 고백하려고 해도 동생처럼만 여기는 채영에 의해 번번히 거절당하자 여자 친구로라도 머물고 싶어 여장을 결심하게 된다. '미세스 다웃 화이어' 나 '투씨' 처럼 외국영화에서는 여장한 남자의 모습이 자주 소개됐지만 사실 한국영화에서는 '여장 남성' 이란 이전에는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캐릭터이다.

문제는 얼마나 그럴 듯한 분장과 연기로 관객들을 속이느냐에 달려있다.

조명에 따라 피부색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기술적인 결함을 드러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안재욱의 여장 연기는, 애초의 의도대로 영화를 리드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특히 친구인 윤철 (강성진) 마저 깜빡 속아 준혁을 여자로 여기고 연애감정을 품는다는 설정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남녀의 성적 정체성이라는 문제까지 부지불식간에 건드리고 있다.

그러나 '전반부는 코믹하게 후반부는 멜로적으로' 라는 전략이 쉽게 간파될 정도로 영화의 분위기가 확연히 나눠진 건 아쉬움이었다. 뒤로 갈수록 영화의 힘이 떨어진 것이다.

황기성의 말대로 '앞으로도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서 승패를 보겠다' 면 웃음을 유발시키는 기제를 좀 더 세련화시킬 필요도 있다. 예컨대 김승우, 권해요, 이상인을 각각 선보는 남자1, 2, 3으로 내세운 장면은 관객들의 배를 잡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의도가 너무 분명해 오히려 불편해지는, '오버' 한 느낌을 주는 삽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두어가지 약점들을 관대하게 대하기로 작정하고 어깨에 힘을 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을 자세가 돼 있다면 '찜' 은 그런대로 즐기만한 오락영화다. '여장남자' 라는 새로운 시도를 큰 무리없이 해냈다는 점만으로도 박수를 아낄 필요는 없겠다. 16일 개봉. 이영기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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