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위험하다]1.어디갔나 문화마인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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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IMF태풍에 그나마 움트던 '문화' 가 날라갈 판이다.지금은 경제를 살릴 때며 '문화가 밥먹여주냐' 는 논리가 큰 소리를 낸다. 하지만 깊이 성찰해보면 경제난의 궁극적 원인도 문화이고 경제를 살리는 길도 문화이며 문화야말로 밥을 먹여준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지금 한국문화가 당면한 위기의 정도를 현장 중심으로 진단한다.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 ' 지난해 4월, 서울 광화문의 당시 문화체육부 건물과 대학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앞 등 곳곳에 새로운 밀레니엄의 도래를 알리는 전광판이 내걸렸다. 그때만 해도 화두는 온통 '문화의 세기' 였다.

지금도 서기 2000년은 며칠 남았나를 보여주는 전광판의 숫자가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지만 어느새 그 열기는 슬그머니 사그러들고 말았다. 전광판 설치와 함께 조직됐던 '문화비전 2000위원회' 의 활동 또한 이제 어디서도 볼 수 없다.

지난 2월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가 지방국립박물관의 지방자치단체 이관 등을 포함한 조직개편안을 발표했을 때는 더욱 가관이었다.문화부에서는 그런 엄청난 변화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 후 문화계의 반대로 백지화되긴 했지만 문화정책에서도 주무부처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문화 주무부서의 상황이 이 정도라면 여타 부서의 공무원이나 위정자들이 갖는 문화마인드의 빈곤상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눈을 돌려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현장의 '문화마인드' 는 어떨까. 김자경오페라단이 국내 오페라 공연 50주년을 맞아 지난달 28일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린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예년에는 입장권 판매가 B.A석 순이었는데 올해는 거꾸로 R석과 S석이 매진되고 B.A석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값싼 B.A석으로 오페라를 즐겼던 중산층들이 문화향수에서 떨어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성공한 민간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 코리안심포니 (음악감독 홍연택) .창단 13년째인 이 오케스트라는 지난달 2월 매년 5억5천만원씩 지원해오던 쌍용그룹으로부터 올해 2억원을 끝으로 지원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관객확보를 위해 다방면으로 뛰었지만 지난 2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106회 정기연주회의 관객 1천3백여명중 유료관객은 평소의 3분의 1선인 1백여명으로 뚝 떨어졌다.

문화계는 90년대 들어 그나마 움트기 시작한 문화마인드의 갑작스런 실종에 크게 우려한다. 김열규 (金烈圭) 인제대 교수 (국문학) 는 문화마인드란 "보다 높은 문화적 가치를 향해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맞춰 나가려는 의지" 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문제는 문화가치가 정치.경제논리를 지배하거나 적어도 공존하는 양상이어야 하는데 거꾸로 정치.경제논리가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문화는 한쪽 귀퉁이로 밀리는데 있다.

IMF한파라 해서 세계문화전쟁이 선포된 이 시점에 문화마인드의 추락을 한탄만 할 것인가. 오히려 IMF체제를 계기로 문화인식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지금 문화선진국으로 떵떵거리는 미국.일본.영국도 모두 어려운 시기에 문화입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에서 우리나라의 문예진흥기금과 비슷한 기능을 맡고 있는 '예술위원회 (Art Council)' 가 구성된 것도 2차대전의 전운 (戰雲) 이 감돌던 1940년이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세계 무대에서 영국이 재기할 길은 문화밖에 없다는 뼈저린 반성이 생사 기로의 영국인들로 하여금 문화쪽으로 눈돌리게 했던 것. 이때부터 연극.TV.비주얼 아트.클래식 음악 등에 공공자금을 집중 투자함으로써 21세기를 앞두고 공업국가에서 정보문화국가로 훌륭하게 변신했다.

"경제가 이 지경인 판에 무슨 배부른 소리냐" 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지금의 경제위기를 부른 금융위기나 기업의 위기도 문화의 취약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권위주의.정경유착 등 그릇된 문화풍토가 화근이다. 이런 풍토는 새로운 문화부흥운동으로 극복될 수밖에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문화대통령' 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큰 기대를 걸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국민은 물질과 가격만이 아니라 인간과 가치도 함께 성장하는 풍토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도 자연스레 커가는 길이다.하지만 아직 문화대통령에 걸맞은 면을 찾기가 어렵다. 곳곳에서 정치논리의 냄새가 너무 짙다.

90년대 들어 어렵사리 지핀 문화용광로의 불씨를 꺼트려서는 21세기 문화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에서 열가지 문화마인드로 무장하지 않고는 경제 회생은 미봉책에 그칠 것이며 민족 창의성의 젖줄은 끊어질 것이다.

정명진 기자

〈m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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