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 버거 보좌관 부상으로 외교 온건해 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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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근 미국의 대외정책이 거의 온건 일색으로 바뀌고 있다. 강경론자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보다는 온건론자인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보좌관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의회 탈환을 꿈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강경정책이 가져올지도 모를 논란을 피하기 위해 버거의 손을 들어 주고 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버거의 입김에 따라 대외정책이 결정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이라크간의 대결상황이 무력을 사용치 않은 채 지나간 것은 버거의 결정이라는 후문이다. 탈냉전시대 러시아와 중국을 적대하는 정책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버거는 이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갖추며 무력충돌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간의 입장차이는 코소보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표면화됐다. 올브라이트는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보스니아 소요를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다.

그러나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해외에서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는 클린턴의 생각을 잘 아는 버거는 군사개입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코소보에 대한 무력개입을 설득하기 위해 유럽순방길에 나섰던 올브라이트는 버거의 반대에 따라 빈손으로 귀국해야 했다.

온건론자인 버거의 영향력은 미국의 대 (對) 중국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버거는 미.중 관계발전의 걸림돌이었던 인권문제를 제네바인권위원회의 의제에서 삭제하는 데 앞장섰다.

대신 지난해말 장쩌민 (江澤民) 중국국가주석의 방미 (訪美) 때 조용히 인권문제를 제기해 중국의 대외적 체면을 세워 주면서 웨이징성 (魏京生) 을 석방토록 하는 타협안을 도출해 냈다. 중국에 대한 원자력발전설비 수출을 허용하고 군사적 목적으로의 전용가능성이 높은 전자부품에 대한 금수조치 해제를 검토하는 것도 냉전종식후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겔트 폴리틱' (돈의 정치학) 을 중시해야 한다는 버거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워싱턴 = 길정우 특파원

〈kilj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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