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왜 좌파를 버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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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뉴스 분석  지난해 하반기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자유주의가 몰락했다”는 자조 섞인 말이 많이 나왔다.

유럽에선 자본주의가 미움의 대상으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실시된 유럽의회 의원선거에선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유권자들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우파 정당에 대거 표를 몰아준 것이다. 유럽 좌파는 왜 경제위기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패배했을까.

이번 선거에서 참패한 영국 좌파 집권 노동당의 데니스 맥셰인 의원은 9일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패배 원인으로 유럽의 ‘국가주의 회귀(re-nationalization)’ 경향을 들었다. 그는 “지금 유럽 사람들은 일자리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겁먹고 있다”며 “이러한 불안한 환경 속에서 유권자들은 방어적으로 국가라는 틀로 회귀했고 보수정당에 표를 던졌다”고 분석했다.

김종법 연세대 유럽연합(EU)센터 연구교수도 유럽에서 최근 들어 국가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경제위기로 인한 불안감 탓에 정치·사회적인 ‘증오의 대상’은 (일자리를 빼앗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후발 회원국 출신 이주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EU라는 국가 통합형 틀 자체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이를 의회선거에서 표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유럽이 대공황 직후 가장 먼저 극우 파시즘이 발흥한 대륙인 점을 지적 했다.

맥셰인 의원은 또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대안을 내놓지 않고 비판만 하는 좌파들에게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해석했다. “유권자들이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좌파보다는 극단주의 정당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대안을 갖고 있는 곳을 택했다”는 것이다. 김호기(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으로 인해) 좌파에게 유리한 조건이 제시됐지만 좌파의 정책 대안이 국민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며 “그래서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서 설득력이 높다고 판단되는 우파의 손을 들어줬다”고 분석했다.

영국 BBC 방송의 마크 마델 유럽 담당 에디터는 “EU 차원의 사회민주주의 실패”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그동안 유럽의 대표 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좌파 제1당이 곤경에 빠져 있었음을 강조했다.

프랑스 사회당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당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사실상 방황해 왔고, 독일 사민당도 대연정의 소수 파트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불확실성에 두려워할 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당연히 사회적 보호를 목표로 삼아야 했는데도,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영감과 조직, 새로운 생각에서 모든 것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맥셰인은 유럽 좌파 지지자들의 모순도 거론했다. 그는 “좌파 지지자들은 세계화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물건 구입을 즐기며, 사회적 보호는 더 많을수록 좋다고 얘기하면서도 값싼 외제차나 수입 의류를 사기를 원한다” 고 지적했다. 그는 “좌파는 20~30년 전, 심지어 50년 전에 사용하던 주문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중지하고 이번 선거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21세기에 걸맞은 좌파로 거듭나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경덕·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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