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경제 이렇게 풀자]2.금융 구조조정 이렇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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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고 있다. "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이 취임 회견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금융 구조조정에 아직 가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그 사이 환율은 다시 오르고 모처럼 안정세를 보였던 금리도 불안해지고 있다.

무디스사는 11일 한국의 은행들에 대한 평가등급을 다시 한두단계씩 하향조정했다. 구조조정이 부진해 불안요소가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 안될 곳은 빨리 털자 = 구조조정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만이다."외국자금을 끌어오려면 금융 구조조정을 신속히 처리하는 길 밖에 없다.

이를 늦추면 조건은 더 나빠지고 값은 더 떨어진다.

" 한문수 금감위 고문의 얘기다. 부실기관이 있는 한 금융시장 전체가 불안정해져 해외차입이나 자금조달이 어려워진다.

우량한 곳도 함께 고사 (枯死) 할 위험이 커진다.또 기업에 대한 자금 중개 기능도 마비상태가 이어진다.

결국 문제가 많은 기관부터 우선순위를 매겨 신속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빨리 할수록 비용도 덜 든다.

과감한 금융 구조조정에 성공한 미국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반면 소극적으로 대응해온 일본은 7년째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 청소는 정부가 맡아야 한다 = 시장기능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를 시장에 맡길 수는 없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금융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민간의 능력으론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다. 외국 투자자금의 유입에 기대를 걸기도 어렵다.

결국 재정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돈을 새로 찍어 쓰거나 세금을 더 거두거나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모두 국민 부담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것도 이번 세대에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적 설득과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 법대로 하자 = 말로는 구조조정을 하겠다지만 실제 닥치면 주춤주춤하고 있다. 동서증권에 대해선 인가취소 방침을 정하고도 엎치락뒤치락했고, 부실기업에 대한 협조융자는 안된다고 했지만 술술 이뤄지고 있다.

부실은행들은 자구노력을 하기도 전에 저마다의 특수성을 내세우며 정치권에 줄을 대기 바쁘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들어주다가는 정리할 은행이 한곳도 없다. 더욱이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제주은행에 내려진 경영개선조치는 '법대로' 의 모범이다.

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1%가 넘는데도 앞으로 부실화할 가능성이 커 금감위가 조기에 조치를 취한 것이다. S은행 임원은 "지역적으로 껄끄럽지 않고 규모도 작아 충격이 덜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점도 있으나 이런 식으로 제도화할 필요성이 있다" 고 말했다.

◇ 주인이 나서게 하자 = 정부는 구조조정을 독려하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현대종금과 합병하겠다는 강원은행을 제외하고는 BIS기준 자기자본비율 미달 은행들중 구체적인 합병계획을 낸 곳이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인이 없기 때문에 합병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선진국 은행들은 합병을 통해 대형화로 죽죽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럴 주체가 없어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남윤호 기자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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