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책사랑] 고려대장경 연구소장 종림 스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전산화한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60) 스님은 40년 전 서울 명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2층 참고실을 잊지 못한다. 경남 함양의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대학(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올라온 스님은 당시 이곳에서 살다시피했다.

“시골에선 책이 귀했잖아. 학교 공부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읽으며 보냈어. 그때 도서관 참고실은 동네 사랑방 분위기였어. 6·25로 공부를 못했던 40대 아저씨들이 도서관에 많이 왔거든. 그 사람들과 세상 얘기도 하고, 책도 보고 그랬지.”

종림 스님은 당시 헤겔→노자·장자 →인도 철학 순으로 빠져들었다.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노자·장자에게서 무위(無爲)를, 인도철학에서 세상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를 받아들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삶의 궁극을 배우고자 ‘입산’했지만 그는 이후에도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스님이라면 당연히 익혀야 할 각종 경전·조사 어록은 물론 일반 인문·사회과학도 빠뜨리지 않았다.

“세상을 해석하는 틀을 대학생 때 닦은 것 같아. 출가 전에도 불교의 기초 교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전에 여러 책을 읽은 바탕이 있었던지 경전을 이해하는 방식도 보통 스님과 조금 달랐어. 스님들은 보통 교학적·포교적 관점에서 불경을 읽지만 나는 사상적·과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거지.”

해인사 도서관장·선원장 등을 지낸 스님은 요즘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관심이 많다. 지난 10년간 팔만대장경 전산화에 진력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세계에 한국 불교가 기여한 게 뭐가 있어. 대장경 전산화는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불교 텍스트를 만드는 거야. 절집도 세상에 따라 변화할밖에 없잖아.”

그가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것도 책이었다. 80년대 초반 아메바로부터 인간까지 생물의 지능이 변화해온 양상을 추적한 『에덴의 용』(칼 세이건 지음)을 읽고 불경 전산화에 착안했다.

스님은 최근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부정하고 정보의 네트워크를 제시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를 정독했다. “세상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어. 모두 연기(緣起)로 이어지는 거지”라는 스님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