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대량실업시대의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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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라는 국가위기 상황에서 두드러지는 양상은 국민생활의 양극화다. 일부 부유층은 고금리시대를 만끽이라도 하듯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고 있다. 반면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 올연말 실직자수가 2백만명을 넘을 전망이다.

대량실업은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범지구적 현상이다. 현재 전세계 8억명 이상이 실업 또는 잠재실업 상태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 에서 제3의 산업혁명인 정보화.자동화의 결과 경제의 전부문에서 기술대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이 일자리로부터 대거 추방되는 전례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실업상태로 있어야 하며 다시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직업교육에 의한 타직종 재취업 가능성은 극히 제한돼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 93년 실직 노동자를 위한 재교육을 받은 사람중 20%만이 이전 급료의 80%를 받는 일자리에 재취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신기술이 특정 부문의 노동력을 대체하면 대체된 노동력을 흡수하는 새로운 부문이 항상 출현했다. 그러나 정보화.자동화시대는 이같은 경험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새로운 부문은 대체된 노동자들 가운데 극소수의 지식부문 엘리트만을 흡수한다. 그밖의 대부분 노동자들은 재고용 전망이 없으며, 이에 좌절한 사람들은 분노를 반사회적 행동으로 발산한다.

리프킨은 여기서 기술과 노동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다. 정보화.자동화사회에서 부차적이고 부적합한 것으로 돼버린 기존의 공동체적 가치를 되살려 인간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는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리프킨의 새로운 사회적.인간적 가치란 구체적으로 사회구성원간의 형제애적 연대 (連帶) ,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봉사적 인간정신의 재발견이다.

리프킨의 주장처럼 요즘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윤리의식의 재구축이다. 얼마전 어느 신문 칼럼에서 한 법학교수가 지적한 대로 '가진 자도 갖지 아니한 자처럼, 직장인도 실직자와 같은 심정으로 함께 걸어가는 사회' 가 지금처럼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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