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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 공포와 감동의 우주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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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하려는데 갑자기 혜성이 나타나자 스님인 융천사(融天師)가 노래를 지어 쫓았다"는 내용이 향가인 혜성가에 전해진다. 사실 혜성이란 게 그냥 둬도 한달 정도면 하늘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니 스님의 신통력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스님이 대단한 역할을 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49년 봄에 혜성이 카시오페이아 자리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혜성 기록이다. 그런데 이때 카이사르는 배신의 복수를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 혜성이 로마에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5년이란 세월이 흘러 또 다른 혜성이 하나 나타났는데, 어느 점성술사가 이를 보고 로마에 새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카이사르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6개월 뒤 혜성 하나가 다시 하늘에 나타난다. 그러자 로마인들은 이를 카이사르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한 혜성이 태양을 돌기 전에 한번, 태양을 돌아서 다시 한번 나타난 데 불과한 것이다.

혜성이 이처럼 공포의 대상이었을 때 이를 잠재운 사람이 있었으니 핼리다. 그래서 가히 그는 혜성의 아버지라 불릴 만하다. 26세 때인 1682년, 그는 큰 혜성을 보고 그 충격으로 혜성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자신이 본 혜성이 사실은 76년마다 태양을 공전하는 천체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아가 1758년에 그 혜성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까지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1758년이 됐는데, 한해가 다 가도록 혜성의 소식은 없었다. 그러던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밤, 결국 희미한 혜성 하나가 하늘에 나타난다. 천문학자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후 그 혜성을 핼리혜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로써 혜성의 공포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1910년 그 핼리혜성이 다시 나타나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독극물을 포함한 혜성의 거대한 꼬리가 우리 지구를 덮친 것이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큰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혜성이 지나갈 때까지 그 주머니 속의 공기만으로 숨쉬는 기현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혜성의 꼬리는 인간에게 아무런 영항을 미치지 못했다. 양이 극히 적었고, 지구의 두꺼운 대기를 통과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86년 다시 핼리혜성이 출현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잔뜩 기대를 걸고 망원경으로 그 혜성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별로 볼 것이 없지 않은가. 실제 이때의 출현은 먹을 것 없는 잔칫상처럼 떠들썩하기만 했지 별로 볼 것은 없었다.

이후 한참 동안 혜성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싶었다. 그러던 94년 슈메이커-레비라 불리는 혜성이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21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이 혜성은 일주일에 걸쳐 마치 가미카제처럼 목성과 충돌했다. 충돌의 흔적은 가공할 만했다. 혜성의 한 덩어리가 부닥쳐 만든 흔적이 지구 크기의 두 배나 되는 것도 있었다. 만약 이 혜성이 목성이 아닌 지구와 충돌했다면?

다시 2년이 지난 96년 초 해일-밥이라는 초거대 혜성이 나타나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당시 나는 일본의 모 대학 연구실에서 새벽까지 남아 있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동으로 난 창을 보고 연구실의 모든 불을 껐다. 그러자 큰 혜성 하나가 창에 그림처럼 걸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공포도 과학도 아니었다. 단지 감동일 뿐이었다.

김봉규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정보연구그룹장

◇약력 : 경북대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 천문학 석사, 일본 나고야대 천체물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