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지방대회 한 어린이의 '우연手' 조훈현·이창호가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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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한 초등학생이 수백명이 모인 시끌벅적한 지방대회에서 우연히 둔 신수. 그러나 고수들은 스쳐지나가는 이 수를 놓치지 않았다.이 수법은 조훈현9단에 의해 국내타이틀매치 결승국에서 최초로 등장했고 급기야 세계챔피언을 가리는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이창호9단이 사용하여 화제를 낳고 있다.

지난 20일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제9기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5번기 첫판. 1억2천만원의 상금을 놓고 이창호9단과 유창혁9단이 격돌한 이번 결승전은 첫판의 향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만약에 李9단이 1국을 이긴다면 승부는 쉽게 끝날 가능성이 높다.그러나 劉9단이 승리한다면 최후까지 불꽃튀는 승부가 될 것이다.

돌을 가려 흑을 쥔 이창호9단은 11까지 최근 유행하는 포진을 펼쳤다.劉9단이 예정대로 12로 달렸을 때 13으로 건너붙인 수가 바로 문제의 한수였다. 과거의 변화로는 '1도' 와 '2도' 가 있다.

'1도' 는 한국식이고 '2도' 는 일본식. 이 둘은 모두 백을 완생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프로적이다.

실전의 변화는 노림을 포기하고 큰 집을 짓겠다는 것으로 분명 아마추어적이다.그러나 13부터 19까지의 변화는 위력이 있었다.李9단은 이날 실리의 우위를 고수하는 작전으로 劉9단에게 189수 만에 불계승했는데 그 이면에는 13의 한수가 역할을 했다. 이 13~19까지의 수법은 지난 3월에 끝난 기성전도전기 제5국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초반 2연승을 달리다가 2대2까지 추격당한 조훈현9단이 최종결승전에서 비장의 수법으로 들고나온 신수였던 것이다.이 대국에서 李9단은 온갖 묘수를 다 동원하여 악전고투한 끝에 겨우 반집차로 역전승한 뒤 이 13에 주목했다.

이 수가 동양증권배 결승전에 등장한 배경이다. 그렇다면 이 13의 원조는 曺9단일까. 曺9단은 "내가 공식전에서 처음 둔건 사실이지만 내가 발견한 수는 아니다" 고 밝혔다.사연을 추적해본즉 지난해 7월 부산에서 제10회 이붕배 전국어린이바둑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한 초등학생이 이와 똑같은 수순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심판관으로 참석한 윤기현9단이 이 수순을 보고 재미있다 싶어 한국기원에서 우쑹성 (吳淞笙) 9단과 몇판을 시험했다.공식대국에선 감히 두지 못하고 연습바둑에서만 사용했는데 구경하던 曺9단도 그때는 이 수를 무심히 보아넘겼다. 올해 2월 일본에서 한 여류기사가 13의 수를 두었으나 14부터의 변화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한 일본기사가 우연히 그 수를 曺9단에게 문의했다.

曺9단은 비로소 그 수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까지의 변화가 훌륭한 수법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조훈현.이창호가 인정한 이 수법은 앞으로 한.중.일에서 크게 유행할 것임에 틀림없다. 거장들은 사소한 것에서 영감을 얻는데 이번의 케이스도 바로 그랬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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