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립극장의 새로운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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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영국의 국립극장 (National Theatre) 은 지난해 10월 신임 극장장 트레버 넌이 등장하면서 대변혁을 단행했다.트레버 넌은 대중적인 상업뮤지컬 '레미제라블' 의 연출자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퍼블릭 시어터 (Public Theatre)' 라는 개념을 도입해 보수적인 국립극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그 자신이 말하는 개념. "사람들이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즐길 수 있는 연극을 해서 이 나라의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지난해 연말 국립극장 산하 로얄국립극단 (The Royal National Theatre Company) 이 외부극단인 시어터 다크 (Theatre Dark) 와 공동으로 어린이용 연극 '피터팬' 을 공연했다.영국 연극계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정도였다.이유는 엄숙한 엘리트주의 극장과 극단이 대중적인 극을 처음으로 내놨기 때문이었다.대중과의 경계를 없애자는 것이 의도였다.

"고전은 고전대로 공연한다" 는 이전의 원칙도 상당히 바뀌었다. 르네상스 시절의 키프로스섬이 배경이었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는 1940년대로 시기를 바꿈으로써 대중들의 이해를 더 쉽게 했고 여주인공 데스데모나의 성적매력을 강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첫 해외공연으로 한국을 선택해 지난 2월11일~20일 사이에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 "셰익스피어 연극, 영국의 고전극, 해외의 고급연극을 다양하게 무대에 올리면서 수준높은 현대적 연극의 발전도 함께 꾀한다. " 이는 1908년 만들어진 창립목적 자체를 바꾸는 대작업에 해당하는 것이다.초대 극장장을 지낸 로렌스 올리비에경을 비롯해 피터 홀 등 전통의 연극인이 셰익스피어 극을 중심으로 한 고급연극을 주로 공연한 바로 그 극단, 그 장소에서 이뤄진 일이라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계기로 수준높은 -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았거나 독서량이 일정 수준 이상인 - 문화인들만 보던 고급연극 대신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국립극장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고 국립극단이 정말 전국적인 극단이 되도록 전국 순회공연을 의무화했다.그것도 런던의 국립극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극장과 극단과 함께 공동작업으로 작품을 올렸다.그 지역 주민이 잘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연극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계층.교육정도는 물론 문화적 지역차등을 극복할 수 있게 국립극단이 앞장서야 한다는 게 주요 명분. 이에 따라 런던의 국립극장에서만 고고히 일하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일년중 최소 3개월, 길면 전체를 지방극장에서 지방극단과 호흡을 맞춰야 했다.

이는 "특색있는 지역문화도 국립극단이 흡수해야 진정한 대중을 위한 국립극단이 된다" 는 트레버 넌의 지론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국립극단이 대중 위에 군림하며 런던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지방에 전하던 시대는 끝났다" 는 것이 그의 신념. 가장 현학적인 집단이었던 영국 국립극장이 이제는 '대중 가까이' 를 실현 중인 셈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런던 =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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