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촌지' 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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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손을 들면 시켜주지 않고 부잣집 아이만 시켰습니다.왜일까요? 그것은 그 애들의 엄마들이 선생님께 돈을 주어서 그랬을 겁니다." "방학 내내 선생님과 엄마를 원망했습니다.우리 엄마도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와 돈을 주었으면 난 점수가 안 깎였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한 학년 올라가서도 또 그런 나쁜 선생님이 걸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어린이 교육연구회가 펴낸 '우리 아이들은 지금' 에 수록된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편지 내용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선생님과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가슴 속에 응어리로 간직한 어린이들의 뒤틀린 심사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그렇다면 이 어린이들이 자라 초등학생 자녀의 학부모가 되는 경우 어렸을 때의 그 쓰라린 경험 때문에 돈봉투를 들고 학교에 찾아가는 짓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까. 아무도 "그렇다" 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촌지 (寸志)' 와 관련한 우리 초등교육의 해묵은 문제다. 촌지는 본래 일본식 한자어로서 직역하면 '손가락 한 마디만한 뜻' 이다.쉽게 풀이한다면 '아주 작은 정성이거나 마음의 표시' 쯤 될까.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오가는 촌지의 규모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의 통계로는 1회에 평균 10만원이다.촌지를 건넨 경험이 있다는 학부모도 80년대 중.후반의 90%에서 다소 내려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70%를 웃돌고 있다.

학부모의 부담이나 교사의 윤리적 타락 등 촌지가 야기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서두의 글에서 나타나듯 어린이 당사자들이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다.촌지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 혹은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발표기회.좌석배치.성적사정.청소나 체벌 따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는 철석같은 믿음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서울시 교육감은 교육부장관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교사들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려 촌지반환 접수처를 설치했으나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는 말로 호도 (糊塗) 하려 했다.10만원 정도면 '마음의 표시' 일 따름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촌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촌지를 받았어도 반환하지 않으면 받지 않은 셈이 된다는 '절묘한' 논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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