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자 교차이동…지방선 무작정 상경 서울선 무대책 귀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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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5일 새벽열차 편으로 대구에서 상경한 철근 기능직 근로자 韓모 (32) 씨는 영등포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인력시장으로 달려갔다.대구지방의 건설경기가 얼어붙어 지난 두달동안 하루도 일을 나가지 못한 끝에 "서울은 사정이 좀 나을까" 하는 마음에 동료 3명과 함께 무작정 상경한 터였다.

영등포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찾는데 실패한 韓씨 일행은 하루종일 10여군데의 직업소개소를 들렀지만 "기다리라" 는 말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韓씨는 한달정도 더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하고 여비로 준비한 돈 30만원을 아끼기 위해 대합실 벤치에서 아픈 발을 주무르며 잠을 청했다.

올해초 대기업에서 떼밀리다시피 명예퇴직한 權모 (38) 씨는 지난달말 농협중앙회가 주관하는 영농취업교실에 등록했다.퇴직후 2개월여동안 이런저런 일자리 물색에 허탕을 친 터라 "농번기를 맞은 농촌에는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權씨는 농삿일을 하면서 생활비도 벌고 과수 재배기술을 익혀 고향인 충북옥천에 과수원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국제통화기금 (IMF) 시대를 맞아 이처럼 일자리를 찾아 지방에서 상경하거나 서울에서 귀농 (歸農) 하는 실직자들의 '교차이동' 이 활발하다.

하지만 사상 초유의 실업난 속에서 이들중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도심 거리나 지방 농.축협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 실정. 노숙자 등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봉사를 하고 있는 서울소재 30여개 자선단체들의 집계에 따르면 급식을 받는 1만5천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는 지방출신의 구직자들로 나타났다.요한의 집 김봉현 (金奉炫) 원장은 "하루평균 3백여명의 무료급식 실직자들을 상담한 결과 그들중 70~80%는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며 이들은 하루 10여명 꼴로 늘고 있다" 고 말했다.

귀농을 희망하는 실직자와 퇴직자들도 크게 늘었다.농촌 파트타임 일거리를 알선하는 농협중앙회 영농취업교실엔 지난해만해도 취업 요청이 거의 없었으나 올들어서는 13일 현재 1만7천여건의 영농취업 요청이 접수된 상태. 중앙회 관계자는 "영농취업교실을 찾는 사람이 하루평균 50건을 넘고 있으며 광주.용인 등 서울근교 단위농협에는 매일 수십명의 구직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이나 농촌이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지난달 목포에서 올라와 서울역 앞의 한달 10만원짜리 여인숙에서 묵고 있는 崔모 (36) 씨는 "서울에 가면 밥은 먹고 산다는 인식때문에 친구 5명과 함께 상경했지만 20여일 동안 단 하루 일했을 정도" 라며 한숨을 쉬었다.축협중앙회 장중명 (張中明) 축산컨설팅부장은 "철저한 예비지식과 준비없는 귀농은 무작정 상경과 다름없는 무모한 일" 이라고 조언했다.

이훈범.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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