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트 찬 감독 영화 '메이드 인 홍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메이드 인 홍콩' 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돼 대단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어른들을 향해 내뱉는 젊은이들의 절규가 담겼다해서 장선우감독의 '나쁜 영화' 에 빗대 '홍콩판 나쁜 영화' 로 불리기도 했다.그러나 젊은 비평가들 사이에 "왜 우리에게는 저런 청춘영화가 없느냐" 는 한탄이 나왔을 만큼 두 작품사이에는 상당한 수준차이가 있다.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결격사유' 로 가득찬, 홍콩의 젊은이들이다.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려 어머니와 사는 스무살의 차우. 일찌감치 학교를 팽개치고 채무자들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는 해결사로 일한다.그의 곁에는 아롱이 항상 붙어다닌다.

그는 지능이 낮아 또래들로부터 놀림당하고 매맞는데 차우가 보호자역을 자청한다.한편 차우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만난 소녀 핑은 불치의 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받는 처지다.

세 사람은 도심 한복판에서 투신자살한 보산이라는 소녀의 집을 추적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인물들이 놓인 지리멸렬한 환경으로만 본다면 영화는 자칫 구질구질하고 청승맞게 흐를 위험을 안고있다.

그러나 주제에 어울리는 시각적 스타일과, 숨겨진 내면을 볼 줄 아는 감독의 사려깊은 시선 덕에 영화는 살아서 퍼뜩퍼뜩 숨쉰다.한 곳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춘의 불안과 허무한 운명을 반영하듯 카메라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으며 앵글도 비뚤비뚤하다.

때로 서민아파트를 아득히 올려다보기도 하고 주인공들을 좇아 카메라도 뜀박질을 하기도 한다.젊은이들의 심장박동같은 자유자재로운 편집에다 신시사이저와 전자 기타의 애절한 음악이 겹쳐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이 적절히 대변되는 것이다.

특히 핑과 차우, 아롱이 묘지의 비석 주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은 지상의 답답함을 후 날려버릴 만큼 환상적이다.이 밖에도 스케이트 보드를 탄 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살인을 저지르는 폭력조직원의 모습이나 총을 들고 차우가 춤을 추는 모습등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들이 숱하다.

프루트 찬 (38) 감독은 놀라운 연출력을 발휘해, 연기라고는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길거리의 아이' 들을 모아 한 편의 훌륭한 '누아르풍 청춘영화' 를 탄생시켰다.그것도 우리 돈으로 1억 남짓한 초저예산으로 말이다.

뒷얘기지만 차우역을 한 리삼과 핑역의 네이키임은 영화를 끝낸 뒤 야간학교에 등록해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어른.아이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반성적 사유로 이끈다.'메이드 인 홍콩' 은 스크린의 안과 밖에서 '영화의 힘' 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힘을 믿지 않았던 이들도, 이번만큼은 쉽게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