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 ‘대우건설 매각’ 말미 얻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이하 금호)이 다음 달 말까지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한 뒤 여의치 않을 경우 계열사인 대우건설을 산업은행이 주도하는 펀드에 매각하기로 했다. 금호는 1일 이 같은 내용의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채권단과 체결했다. 이로써 재무구조 개선 대상인 9개 그룹 모두가 채권단과 약정 체결을 마쳤다. 선언적 차원에 머물던 대기업 그룹(주채무계열)에 대한 구조조정이 실무작업 수준으로 접어든 것이다.

약정에는 대기업 그룹이 분기별로 달성해야 할 부채 비율 등 구체적인 평가지표가 명시됐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계열사나 부동산 등 자산 매각 방안도 약정에 포함됐다. 채권단은 분기별로 약정 이행 실적을 점검한다. 실적이 부진하다고 판단되면 채권단은 최악의 경우 기존 대출을 회수하거나 신규 대출을 중단할 수 있다.

약정을 체결한 그룹 중 네 곳은 이미 지난해에도 약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비교적 일이 쉬웠다. 나머지 4개 그룹도 이미 계열사 매각 등 자구계획에 나섰거나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금호는 지난해부터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논의해 왔지만 약정 체결 마감 시한(5월 31일)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대우건설의 처리 방안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다. 이날 체결된 약정은 양측의 주장을 적절히 반영하는 수준에서 결정됐다.

약정에 따르면 2개월 동안 금호 측은 은행 등 투자자들이 가진 대우건설의 지분을 인수할 투자자와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투자가 집행돼야 한다. 그러나 기한 내에 계획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금호는 대우건설을 산은 주도의 사모투자펀드(PEF)에 매각해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금호 관계자는 “새로운 투자자와 이른 시일 내 MOU를 교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금호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투자자들과 맺은 계약 때문이다. 금호는 2006년 12월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투자자들로부터 3조5000억원을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금호는 올해 말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을 밑돌면 투자자들에게 차액을 메워주기로 계약(풋옵션)했다. 예컨대 연말 주가가 2만원이라면 금호는 투자자의 지분(38.6%)을 넘겨받되 주당 1만1500원을 현금으로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1일 현재 대우건설의 주가가 1만1500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주가가 계속 이런 상태라면 금호가 투자자에게 물어줘야 할 돈은 3조~4조원에 이른다.

금호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해 7월 금호생명 매각 등 일련의 자구계획을 내놨다. 그러나 곧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서 자구계획이 거의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산은은 PEF를 만들어 대우건설의 주식과 풋옵션을 사들이되 향후 대우건설을 재매각할 때 금호 측이 이를 우선적으로 사들일 수 있는 권리도 부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금호는 산은의 요구대로 현재 주가에 경영권 프리미엄(30%)만 받고 되팔 경우 엄청난 손실이 발생해 그룹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주장해 왔다. 대우건설의 최대 주주이자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금호산업이 타격을 받으면, 금호산업이 지분을 갖고 있는 계열사들도 함께 부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대우건설은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지난해 인수한 대한통운의 최대 주주다. 대우건설이 넘어가면 대한통운의 경영권도 유지하기 어려워져 그룹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채권단 관계자는 “금호의 입장이 워낙 강경해 절충안 이외엔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금호는 풋옵션의 만기를 3년간 연장하되 연 6~9%의 확정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투자자를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투자자에겐 2만원가량의 주가에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질 전망이다.

김준현·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