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가랑이 밑 지나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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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옛날 한신 (韓信) 이 불량배들이 시키는대로 그들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나간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예와 굴욕, 장기와 단기, 의 (義) 와 이 (利) , 이런 선택지 (選擇枝) 가운데서 그는 단기적으로 굴욕을 참고 보신 (保身) 이라는 利를 일단 택했다.

그럼으로써 장기적으로 명예.義.利, 이 모두를 몽땅 잃어버릴 위기를 모면했다.그는 싼 값을 치렀고, 이 점에서 후세의 모범이 돼 있다.

한국이 지금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면 한신처럼 남의 가랑이 밑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부실한 금융기관과 기업 가운데 자력으로 살아날 수 없는 것은 속히 퇴출시키는 것이 둘째 조건이다.셋째는 정부와 기업을 세계적 표준에 맞게 구조를 조정하는 것이다.넷째는 모든 지출의 절약이다.

그 가운데 첫째 조건에 관련된 일부를 이 글은 다루고자 한다.남의 가랑이란 국제적 금융기관들의 가랑이를 말한다.

그 밑을 기어야 하는 것은 기왕의 빚에 대한 상환을 연장해 얻고 새로운 장기 차관과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다.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을 생각하면 가랑이 밑 기기는 잃은 소를 찾아오는데 해당한다.

다른 세 조건은 외양간 고치기에 해당한다.객관적으로 말해 초거대 (超巨大) 규모로 성장해버린 국제금융자본 거래는 엘니뇨 현상에나 비길만한 너무도 위협적인 환경이 돼버렸다.

엘니뇨는 지구의 어떤 곳에는 폭우, 어떤 곳에는 가뭄의 극단을 몰고 온다.초거대 국제금융자본은 수익과 위험, 이 두 신호를 따라 국경을 먹구름처럼 넘나들며 돈의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한 현상이지 그 누구의 음모 (陰謀) 도 결코 아니다.미국 MIT대의 L 서로 경제.경영학 교수는 이 재난을 지진 (地震)에 비교한다.

지질의 단층구조가 심한 곳에는 반드시 지진이 일어나지만 그 시기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이 재앙을 단기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K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설명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자본의 과도한 축적으로 그 수익성이 줄어들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털끝만한 수익성 차이를 찾아 온 세계를 헤매 다니다가 위험을 감지하면 놀라 떼를 지어 탈출하는 국제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마르크스의 이 종말론적 저주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한국의 경제적 단층구조는 우리 잘못으로 생긴 것이지만 통화.금융위기라는 지진은 그들의 탈출과 함께 일어났다.

문제는 그들의 가랑이 밑을 다 빠져나가기 전에는 무슨 일로든 그들을 다시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저번 제2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런던 정상회합에서 "국제적 불건전 세력에 의해 야기된 금융위기로 인해 건실한 기업, 선량한 시민이 희생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고 한 말은 자칫 국제금융자본에 대한 매도로 들렸을 수도 있다.

金대통령이 이 말을 하고 있던 그 즈음 이규성 (李揆成) 재경부 장관은 30억달러의 외환평형채 세일즈, 80억달러 13개국 협조융자의 인출, 국제통화기금 (IMF) 이 지워놓은 고금리의 인하를 교섭하기 위해 미국에 있었다.모든 일을 너무 과민하게, 그리고 비관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곤란하지만 李장관의 미국 업무는 잘 풀리지 않았다고 보도됐다.

그 대신 金대통령의 ASEM 활동은 각광을 받았다.

ASEM은 아직은 그 회의 내용보다 참가국 가운데 미국을 빼놓았다는 점이 더 중요한 국제회의란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상 (思想) 있는 사람' 이란 점에서 김영삼 (金泳三) 전임대통령보다는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현격하게 키가 크다.그러나 사상이 있는 정치지도자는 사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실용주의 (實用主義) 적 언급이나 대응조차 그가 지닌 사상 구조의 산출물로 여겨지게 된다.

심지어 그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 달성" 모토 가운데 '민주주의' 를 일본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인 나카무라 (中村政則) 히도쓰바시대 교수는 '평등주의' 로 해석해 크게 환영하고 나왔다. 내 생각에 김대중대통령은 당분간 다만 한신의 고사 (故事) 를 실천하기 위해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 마저 빼고 '시장경제' 하나만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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