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편지 ⑬ ‘종의 기원’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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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언 선생님,

(…) 제 책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두서너 가지 사실들에 근거한다면 어떤 관점을 갖든지 선생님의 비판에 맞설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제 책이 지닌 진실의 무게가 저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순교자인양 집착하고 있다고 비웃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 제 의견이 대체로 맞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학의 진보를 이끌고 가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그 판결은 제게 달린 것이 아니라 과학 분야 명사들의 증언에 달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1859년 12월 13일, 찰스 다윈


 다윈의 진화론이 동아시아에서 출현했다면 그렇게 큰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을까? 다윈의 생각은 서구 세계관의 바탕이었던 ‘신의 설계’라는 벽돌을 하나 뺐다. 그 벽돌이 모퉁잇돌 바로 아래 있어서 사회 전체가 휘청했다. 그 돌은 우리의 동양적 세계관 아래에는 없다. 이 땅에서는 누가 진화를 이야기했다고 해도 서구가 받았던 크기의 충격이 없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군함을 타고 세계를 누빈 다윈·헉슬리·후커 등의 보고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한 과학자들은 진화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했다. 하지만 ‘신의 설계’라는 생각까지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공룡이란 이름을 고안했고 대영박물관의 자연사부장을 맡고 있던 리처드 오언(1804~92)은 당시 자연사 분야의 대표적인 스타 학자였다. 오언은 다윈이 비글호 항해 중에 얻은 표본들을 연구해 지질학회가 주는 상을 받았고, 다윈의『비글호 항해기』를 교정해 주기도 했다. 성경에 기반한 지질학이나 ‘창세기’의 축자적 해석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하지만, 종이 변하는 원인에는 여전히 신의 손길이 작동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다윈과 다른 입장에 선다. 특히 인간만큼은 다른 생명들과 다른 존재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헉슬리가 몰아붙인 것과 같이 오언이 반(反)계몽주의자나 무지한 비전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1860년 옥스퍼드에서 열렸던 영국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서 헉슬리와 벌인 논쟁 때문에 오언은 다윈 반대파의 수장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오언은 인간과 영장류의 뇌를 비교하면서 인간과 유인원의 연관관계를 부정했다. 헉슬리는 격렬한 어조로 허풍을 떨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다윈은 오언이 뻔한 사실에 반대하는 이유를 『종의 기원』의 성공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오언이 ‘다윈의 불독’이었던 헉슬리보다도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럼에도 오언은 이전 세계관을 허무는데 좀 더 신중했다. 결국 그는 구시대의 인물로 낙인이 찍힌 채 역사에 기록됐다. 역사는 이긴자의 것이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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