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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뿔난 집’ 명동성당 건립 … 훗날 민주화 성지로 시대 이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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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듬해이자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가 들어오기 10년 전인 1785년.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함께 모여 신앙을 키우던 이들의 모임이 명동 부근 김범우의 집에서 처음 열렸다. 박해의 칼날이 드리워진 한 해 뒤 김범우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를 따라 방방곡곡을 붉게 물들인 1만여 명이 넘는 신도들과 10여 명의 성직자가 흘린 피를 딛고 이 땅에도 신교의 자유가 깃들었다. 1898년 5월 29일 신앙공동체의 발상지이자 최초의 순교자 집 근처 언덕바지에 들어선 명동성당의 축성식이 열렸다. 행사를 집전한 뮈텔 주교의 말마따나 “지평선을 멀리 굽어보는 우리 성당의 종탑”은 서울 장안 어디에서나 보이는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빌딩이 숲을 이루고 사람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오늘 계단 공사가 한창인 밭과 숲이 어우러진 전원 속 명동성당(사진 왼쪽·사적 제258호)과 1890년에 지어진 2층 양옥 주교관(사진 오른쪽·현재 사도회관)의 고즈넉한 모습은 격세지감을 자아낸다.

“언덕 위의 뿔난 집”으로 불린 구한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며 총본산이었기에 그 영욕의 역사를 대표한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천주교 주교회의는 ‘쇄신과 화해’라는 제하의 참회문에서 일제하 독립운동을 돕지 못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부끄러운 교회사를 성찰하였다. 그러나 명동성당이 욕된 역사의 구심 축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개발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은 “시대의 요구와 아픔, 민중의 눈물을 품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모태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곳이 영혼의 구원을 위한 신앙의 터를 넘어 “한국 사회의 고뇌와 눈물이 밴 정의의 보루”이자 “민주화의 성지”였던 그 시절.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불의와 폭력, 인권침해 등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하는 악에 예언자적 소명의식을 갖고 당당히 맞선” 김수환 추기경이 그곳에 항상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를 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우뚝 섰던 큰 어른 추기경. 분열과 갈등을 넘어선 화해와 사랑을 몸소 실천한 그의 빈자리와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세요”라는 마지막 말씀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는 오늘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