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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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봐, 한선생. 내가 물정 모르고 날뛰는 코흘리개인가? 그때의 일을 발설하면, 한선생보다 나부터 박살내려 덤빌 텐데,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그 말을 헤프게 나불댈수야 없지. 그건 그렇구. 주문진 나설 때, 봉환이가 며칠 동안 두고 뜸을 들여보자고 심술을 부리던 까닭이 미심쩍다 했더니 이제사 내막을 알아차렸으니 나도 숙맥이었지 원. 그런데 저 성질 고약한 위인이 곁을 주지 않는 승희를 끝까지 바라보기만 할까? 어림없는 얘기야. 승희가 길게 버티면 요절을 내고 말걸? 몽둥이질 당한 승희가 굴신을 못하고 드러눕게 되면, 그땐 또 어떤 꼴사나운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난 견디다 못한 승희가 한선생과 있었던 일을 실토정해버릴까 겁나네. 그렇게 되면, 우린 동업이고 뭐고 난장판이 되는 거지. "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승희가 나이는 많치 않아도 세파에 시달림을 받은 여자예요. " "세파에 시달림을 받은 여자는 허물을 남에게 돌리는 단작스런 짓은 될수록 삼간다는 얘기 같은데…, 세파도 세파지만, 승희가 당찬 성품이 아니어서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강단이 있을까?" 철규가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차창 밖 저만치서 봉환의 모습이 나타났다.

봉환은 어쩐 셈인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불쑥 내뱉는 말은, 진부에서 하룻밤을 더 지체하고 내일 새벽에 떠나자는 제안이었다.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땅거미식당 아낙네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었다.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날 수 없는 사연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있었던 절통한 내막을 미주알고주알 캐물어볼 수도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매한 표정으로 봉환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서 영월까지는 2백리 가까운 잇수라 카지만, 새벽 5시쯤 떠나서 들입다 밟으면, 빙판길이라 하더라도 아침 8시전에는 도착할 낍니더. 두 분 형님께서 난처하디라도 내 사정 좀 봐주셔야 되겠습니더. " 봉환의 세련된 운전 솜씨를 믿기보다는 난처하게 된 처지를 생각해서 동의하고 말았다.

차는 식당 앞에 주차시키기로 결정하고 두 사람은 운전석을 내려오며 내일 새벽 5시에 식당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봉환이가 차를 주차하고 식당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장터거리에는 벌써 희뿌연 겨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장꾼들이 빠져나간 거리도 을씨년스러웠지만, 손님 없는 술청은 냄새만 퀴퀴할 뿐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주방의 아낙네는 조리대 앞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하는 지난 밤의 후회가 가슴을 쳤다.

하룻밤만 더 묵고 가라는 아낙네의 당부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양해를 얻어 되돌아온 것이었다.

아낙네의 성품이 악바리 같았거나 태도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면, 오히려 매정하게 돌아서기가 손쉬웠을 텐데, 그것과는 판이하게 오히려 미욱하고 어눌했던 것이 봉환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가 술청으로 들어서자, 아낙네는 소스라쳐 눈물을 훔치고 태연을 가장했다.

이름은 물론이었고, 나이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다.

오고 가는 일과 떠나고 머무는 일이 지향없고 덧없는 사람들 끼리 주고 받는 말이란, 원래가 반은 농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음인데, 이 여자는 그것을 모르고 이름 그대로 미련했다는 것이 봉환에겐 모처럼 괴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승희로부터 받고 있는 괄시와 수치로 뒤숭숭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내팽개치듯 몸을 탐했던 것이 이름도 모르는 식당의 주방 아낙네였는데, 하룻밤의 잠자리인들 헛되게 여기지 않으려는 아낙네의 진솔한 말이 봉환을 잡기는 처음이었다.

낯선 손님들에게 술시중까지 들어가며 잠자리에 누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봉환은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몇 번인가 다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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