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어린이 가슴에 ‘희망’ 시술한 의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15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별관 8층. 소아심장을 전공하는 이흥재(62) 교수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헬로.” 수화기 너머로 영어 인사가 들렸다. 다섯 살짜리 베트남 소녀 뜨렙이었다.

“제가 영어를 배웠어요. 지금 건강합니다. 고맙습니다.”(뜨렙)

“국제전화 요금이 비싸지 않니?”(이 교수)

삼성서울병원 이흥재(소아심장전공) 교수(左)와 전태국(흉부외과) 교수는 7년간 베트남 심장병 어린이 50여 명을 수술하고, 의료진에 수술법을 전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두 교수가 수술실에서 만났다. [김도훈 인턴기자]


뜨렙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 교수는 “손님이 와 있어. 다음에 통화하자”고 전화를 끊었다. 뜨렙은 2006년 이 교수팀에게 무료 심장 수술을 받은 뒤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짧은 대화가 끝나자 이 교수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교수는 뜨렙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아이들이 영어를 배워 전화할 때 뿌듯하다”고 말했다.

베트남 아이들과 이 교수의 인연은 2003년 7월 시작됐다. 심장병 수술법을 배우기 위해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던 베트남 하노이 국립아동병원 교수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전태국(47·흉부외과) 교수와 함께 휴가를 내 베트남을 찾았다. 하노이 국립아동병원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50여 명이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수술실에는 심장병 수술기구들이 있었다.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수술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수술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약물 치료만 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아이들의 똘망똘망 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두 교수는 귀국 길에 “최대한 살려 보자”고 뜻을 모았다. 이렇게 ‘하트 투 하트(Heart to Heart)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해 9월 10여 명으로 구성된 수술팀이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추석 연휴에 휴가를 붙여 일주일 일정을 짰다. 삼성전자 베트남 현지법인에서 30만 달러를 지원했다. 메스, 이동형 심장 초음파 기기 등 각종 수술장비를 가져갔다. 린(7·여)을 비롯해 어린이 5명을 수술했다. 어떤 때는 베트남 의사들이 수술을 하고 한국 수술팀이 보조했다. 수술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이 교수는 12차례, 전 교수는 15차례 베트남을 찾았다. 명절 연휴와 휴가를 썼고 때로는 금요일 진료를 마치고 밤 비행기를 탔다. 주말을 이용해 수술하거나 수술법을 가르쳐 주고 바로 돌아왔다. 그동안 베트남 의료진 44명을 한국으로 초빙해 의술을 전수했다. 이 교수팀은 50여 명을 직접 수술했고, 하노이 국립아동병원 수술팀은 800여 명의 새 생명을 찾게 했다. 현지 의사들의 수술 실력이 향상돼 매년 350명을 수술한다. 이 병원에는 내년 말까지 심장병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다. 이런 노력 끝에 50% 수준이던 심장병 아동 생존율이 90%까지 올라갔다.

두 교수는 이달 7일 베트남을 다녀왔다. 우엔 꿕 찌옌 베트남 보건부 장관이 정부를 대신해 두 교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수술팀의 7년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전 교수는 “죽어 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싶어 시작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방적으로 의술을 전수해 준 게 아니라 베트남과 함께 일하는 것”이라며 “내가 즐거워 한 일”이라고 했다.

두 교수는 앞으로 5년 정도 하트 투 하트 프로젝트를 계속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이에 필요한 돈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강기헌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