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신뢰 산산이 깨는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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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흉기를 든 강.절도범에 맞서는 용감한 시민들이 화제가 될때마다 경찰은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위험할 수 있으니 경찰에 맡겨달라' 며 신고정신을 강조한다.

'민생치안' 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경찰의 다짐은 시민들을 든든하게 해준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 에서 이러한 약속이 실천되지 않으면 이러한 기대는 분노감으로 바뀐다.

주부 K씨 (30.경기도부천시) 는 13일 늦은 밤 경찰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깨지게 하는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이날 오후11시30분쯤 서울 신도림역에서 인천행 전동차에 올랐던 K씨는 바로 뒤에서 몸을 더듬는 20대 중반의 남자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치한은 곤색점퍼와 약모차림의 경찰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실수이겠지' 라고 생각, 몸을 밀쳐냈으나 성추행은 20여분동안 집요하게 계속됐다.

이에 견디지 못한 K씨는 전동차가 부천시 역곡역에 도착하는 순간 추행범의 멱살을 잡아 개찰구 옆에서 근무하던 부천남부경찰서 역삼파출소 소속 朴모 (21).裵모 (21) 의경등 2명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K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잠시. 경찰관 복장의 추행범이 오히려 "지갑이 없어졌다.

저여자가 소매치기다" 라고 소리치자 朴의경등은 K씨에게 파출소로 갈 것을 요구했고 이를 틈타 추행범은 쏜살같이 역사를 빠져나가 도주했다.

의경들은 같은 열차에 탔던 시민 30여명이 거세게 항의하자 20여분이 지나 K씨를 풀어주었다.

경찰은 뒤늦게 "경찰관이 추행범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며 변명하고 있으나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질책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시민이 어렵게 잡은 범인이 경찰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목격자 수십명의 말보다 더 믿는 경찰들의 한심한 모습에서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운운하는 자체가 어색한 일이다.

나현철 〈전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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