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가 반미감정 확산…내수확대요구에 "내정간섭"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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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요리를 내놓는데는 순서가 있는 법. 경기대책도 마찬가지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일본총리는 최근 측근들에게 불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득세 감세를 통한 대규모의 내수확대책을 내놓으라는 미국측의 구체적인 요구에 대한 반발이다.

총리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일 정부와 자민당 안에서도 이에 따라 반미 (反美) 감정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선 비교적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해왔던 자민당으로선 이례적인 분위기다.

자민당의 차세대 실력자인 야마사키 다쿠 (山崎拓) 정조회장은 "해외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듣기 싫다" 며 미국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의 정치적 맹우 (盟友) 인 가토 고이치 (加藤紘一) 간사장도 "소득세를 줄인다고 물건을 사는 시대가 아니라 저축에 흡수된다.

일본의 경기대책은 우리가 한다" 며 지원사격을 가했다.

미국 고위 관리들의 대일 (對日) 언행에 대해 일 정부와 자민당내 곳곳에서 들려오는 '내정 간섭' 이라는 강력한 반발의 목소리들이다.

이같은 자민당의 반미 감정 속에는 "남의 사정을 너무 몰라준다" 는 섭섭함이 깔려 있다.

추가 경기대책에는 하시모토 정권의 명운이 달려있는 데도 미국은 제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같은 일본안의 반미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요구의 강도를 높여만 가고 있다.

일본의 내수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아시아 경제는 물론 자국경제에까지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다급함 때문이다.

미국은 하시모토 정권이 집착하고 있는 공공사업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은 단호히 거부한다.

10조엔 (약 1백20조원) 규모의 내수확대책과 대규모의 소득세 감세, 규제완화책을 내놓도록 하라는 것이다.

일 정부가 최근 공적자금 (세금) 을 은행 구제에 투입한데 대해서도 미 정치권은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로렌스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은 "참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고 화를 냈다.

이를 지켜보는 외교 관측통들은 "2년만에 또 다시 미.일 마찰이 재현되는 게 아닌가" 라며 양국의 '불협 화음' 에 주목하고 있다.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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